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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줌 Feb 07. 2022

다른 기억

나의 기억과 다른 아빠의 모습


무뚝뚝한 우리 아빠. 대화가 없는 우리 부녀. 결혼할 때도 아이를 낳아서도 5분 이상 대화는커녕 주고받는 안부전화 한 통도 한 적이 없는 아빠. (항상 엄마와 대화) 그런 아빠와의 수다가 가지고 있던 기억들과 다른 뜻밖의 이야기.


오랜만에 명절이라 옛이야기 나눴다.

어느덧 나는 마흔이 가까워 온 나이가 되었고

내 인생 전반에는 아빠의 삶이 녹아 있는 듯 하다 생각한던 참이였다. 인테리어 업무를 하며 인테리어 필름 기술, 실리콘 코킹 기술을 익혔다. 앞으로는 목공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목공 쪽 일도 겸하고 싶다 말씀드렸더니 아빠는 아니라고 다.

"네가 못할 것 같으니 하지 말아라"


딱딱하기 그지없는 그 말 한마디에 인테리어 작업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일을 처리할 때 알고 시키는 것과 모르고 시키는 건 달라서 기술부터 배울 거라 말씀드렸더니 "힘든 일은 하지 말아라" 하신다.

대학생 땐 도넛 알바, 바리스타, 피자집 다수의 알바를 했었고 컴퓨터공학과를 나와서 프로그래머가 되었고 it업계, 커피숍 그렇게 수많은 들을 돌아 돌아 결국은 인테리어 관련 일을 하고 정착하게 된 것에 아빠가 건축업으로 수십 년을 하고 퇴직하신 것을 봤듯이 나도 결국은 그 일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든든하게 밀어주실지 알았더니 목수가 드는 나무는 얼마나 무겁고 어깨는 얼마는 아픈지 아느냐는 말에 그 뜻알지만 서운하다. 나는 평생 우리 집 마당 한편에 공구들, 장비들을 보고 자라 친근해서인지 평생 내 직종이 될 것 같아 늦었지만 하나라도 더 배우고 익히려고 하는데 여자가 하기 힘든 일이니 하지 말라니...



또 온라인 판매가 잘되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그 이유를 묻기에 조금 남더라도 저렴한 가격으로 팔고 있다 말씀드렸더니 장사는 남아야 한다. 손해보고는 팔지 말라고 하신다. 저렴하게도 팔아보고 비싸게도 팔아보고 여러 가지 마케팅도 해봤지만 어린 시절 아빠가 일하시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서비스도 주고 언제나 가족한테 하는 것보다 친절하셨고 아는 사람들은 그저 그냥 주기도 하셨다.  '그래. 해보니 아빠가 하셨던 것처럼 넉넉하게 베풀고 아낌없이 줄 때 나에게 칭찬과 더불어 판매도 잘되는구나'를 느꼈는데

아빠의 말이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냥 주지 마라. 장사는 남고 팔아야 한다' 라니..

누구에게 상의하고 도움을 청하기보다 알아서 결단 내리고 처리했던지라 수년이 흘러 아빠와의 장사 마인드가 많이 다르다.



 어린 시절 우리 4남매가 뭘 사달라는 말도 없고 키우기도 수월했다 하신다. 그때 우리 집에 집도 몇 채씩 되고 잘 살았는데.."라고 얘기하시는데 그때 저희 용돈, 조금 주셨잖아요 했더니


"돈 달라고 하지." 하신다.

"그걸 왜 지금 말하세요. 말하면 주는 건지 알았으면 떡볶이도 맨날 사 먹었죠. "

아빠는 우리 애들은 돈 달라는 소리를 안 해서 돈 필요한지 몰랐다고 하시는데 사실 그건 아니다.

아빠의 기억엔 일도 잘돼서 잘 벌었다는 것도 맞고 집이 여러 채 있었다는 것도 사실일 수 있지만 내가 느끼기엔 집을 산다고 현금이 부족했던 것 같고 또 물건에 사치하시는 부모님도 아니셔서 좋은 물건 좋은 옷 본인들이 안 사시니 우리도 떨어지는 떡고물이 없었던 것 같다.

 엄마는 그때 필요한 것 있었으면 다 사줄 걸 누가 돈 좀 빌려달라고 하면 큰돈도 잘 빌려주었는데 너희한테 넉넉하게 못 쓴 거 같다고 이제 와서 안타까워하신다. 펑펑 쓰다가 못 썼으면 망한 것 같은 기분일 텐데 처음부터 크게 돈을 안 써봐서 어린 시절엔 그냥 그냥 살만했다.

그렇게 넉넉하게 주시진 못했지만 내가 기억하는 모습에서 결국은 물고기는 주지 못했지만 물고기 잡는 법은 알려주셨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부가 1억이라는 돈으로 시작한 나의 결혼생활은 어느덧  아파트 한 채, 작은 상가 하나, 그리고 운영 중인 상가의 권리금과 보증금까지 나의 큰 자산이 된 것도 아빠가 우리에게 남들처럼 책장 가득 책을 사주지 않았고 읽어주시지 않았고 경제관념을 알려주시지 않았지만 내가  자라오는 과정 속에 아빠는 늘 경매책을 들고 계셨던 것.

아빠가 집을 구매하고 파는 모습.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물을 경매를 통해 얻어주는 모습도 건물이란 것을 사고파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주셨다. 나도 그래서 쉽게 투자를 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인테리어 업종으로 나가는 것도 남들한테 서비스하는 것도 나는 아빠를 보고 배웠는데 아빠는 그게 아니라고 다.

대화 없이 보고만 자라서 혼자 그 뜻을 이해하고 판단했더니 아빠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았.

혼자서 피식웃을 만큼 뻘줌하게도 다른 기억과 생각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더니 나는 아빠의 삶을 너무나 멀리 떨어져서 보고 있었나 보다.

예쁘게 포장되어 아빠를 보고 있었지만 사실 과거의 아빠를 가까이서 보았다고 해도 너무 비극적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가장으로써 너무 무거운 무게로 4남매를 길러주신 아빠, 사실 터놓고 이런 말을 하긴 쉽지 않지만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와 아빠의 기억, 생각이 다르지만 내 결정에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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