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일억을 사기당했다는 말이었다.
남편은 경찰서와 회사를 왔다 갔다 하며 신고하느라 바빴지만 어떤 사건이든 골드타임이 있듯이 벌써 돈을 찾기에는 늦은 듯했다.
나는 좋은 일보다는 나쁜 소식을 발 빠르게 어른들께 전달하는 타입이라 친정엄마부터 이 사실을 알렸다.
우리 엄마는 딸인 나보다 사위를 더 챙기시는 입장이라 내가 남편에게 화나는 일로 전화할 때면 착한 정서방한테 너무 그러지 말라고 하신다.
항상 시댁이나 친정에서는 사람 착하다는 이유로 남편 편을 들어준다. '내가 오죽하면 이럴까? 나도 착한 사람이야.' 헌대 자꾸 나만 남편 잡는 나쁜 여편네로 낙인찍혀 억울하던 참이다.
친한 언니들한테도 남들 다 하는 남편 욕을 나도 한입 거들까 싶어 동참하려고 치면 "너네, 남편은 착하잖아. "
"너는 좋겠다. 남편이 다해줘서" 같은 상황에 맞지 않은 답변이 돌아오곤 한다. 남편이 다하기는.... 내가 다하는데
" 제가 다해요. 남편은 시키는 것 밖에 안 해요" 할 때도
시키는 것만 잘해도 된 거라며 시키는 것조차 못하는 남자 놈들이 수두룩하다고 일면식도 없는 남편 편을 들었다.
나는 어쩐지 이번 일이 속이 시원한 느낌이다. 나에게 씌워진 프레임과 남편에게 씌워진 착한 남편 프레임이 벗겨진 듯하다. 거기다가 '돈이야 있다가도 없는 것 없다가도 있는 것 ' 명확한 전제조건 속에 또 벌면 그만이다.
내가 돈을 잃었을지 언정 우리 가족의 안식처(아파트)는 그대로고 삶의 터전(직장) 또한 그대로이며 나의 가족(건강)도 그대로이다.
"니 속이 어떻겠니?" "불쌍해라 우리 딸"
"엄마, 난 괜찮아요. "라는 말을 문자로 열댓 번 벌써 이틀째 하고 있지만 엄마는 나의 "난 괜찮아요"라는 말이 와닿지 않으신가 보다. 카카오톡에서는 몇 차례 '! 삭제된 메시지입니다'라는 말이 떠있다.
어떤 말로 위로하면 좋을지 이렇게 저렇게 딸의 눈치를 보며 지우시나 보다.
입학을 앞둔 손녀딸의 안부를 물으며 사실은 내가 지금 뭘 하는지 밥은 먹고 있는지 필요한 건 없는지 궁금하신 듯하다. 내가 내일밖에 시간이 없는데 남편 경찰서 간다고 백화점 갈 시간이 없네라고 말했더니 "그래 얼마냐. "부터 계속해서 내가 쓰는 돈 내가 써야 할 돈에 초점을 맞추신다.
"엄마, 괜찮아. 우리 상가 있는 거 팔면 돼."
현실적인 가장 간단한 결론으로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해 버렸는데 미안하다고 하시는 엄마.
도대체 남편이 잘못했는데 엄마가 미안해야 하는 현실.
걱정 많은 우리 엄마한테 드디어 기특한 딸 노릇을 하나 싶었는데 남편 때문에 걱정 끼치는 딸이 되어버렸다.
자식이 넷이나 되어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다는 엄마. 걱정 좀 그만하고 사시라고 이렇게 낳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안 해주셔도 된다고 하지만 못해줘서 미안하다는 엄마.
엄마의 자리는 뭘 얼만큼 자식에게 해줘야 본인 스스로 '너무 많이 퍼줬다 그만 주어야지' 싶을까?
괜찮은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괜찮은데...
사기당했어도 괜찮은 게 아니라 그냥,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