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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가 김서령 Nov 20. 2017

그때 그 시절

사라진 거리들에 대한 이야기

기억나니, 그 시절




초등학교는 포스코 사택단지 안에서 다녔던 터라 우리는 다 사는 게 고만고만했다. 

니네 아빠는 무슨 일 하셔? 묻는 것이 아니라 니네 아빠 오늘 야근이셔? 묻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친구네 아빠가 야근을 하고 돌아와 낮에 집에서 주무신다면 놀러갈 수 없었으니. 엄마들은 야근이 아닌 집으로 오르르 몰려가 십원짜리 내기화투를 쳤고 우리도 야근이 있는 집 골목에서는 놀지 않았다. 되도록 멀찌감치 떨어져 공기놀이를 하고 고무줄을 넘고 숙제를 했다. 세상 모든 아빠들은 3교대 근무를 하고 월급을 꼬박꼬박 받아오고, 그러는 줄로만 알았다.


중학교에 입학하고나서야 다른 아빠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중학교 1학년 때 제일 친했던 친구의 아빠는 택시 기사였다. 엄마와 나는 시장에 들렀다가 친구 아빠의 택시를 탔다. 택시비를 받지 않겠다는 친구 아빠와 실랑이를 한참 하다가 엄마는 앞좌석에다 택시비를 던지고 후다닥 내려버렸다. 우리 정순이랑 잘 놀아라, 싸우지 말고! 차창 너머 친구 아빠가 소리쳤다. 


TV 어린이 노래자랑에서 상도 받았던, 키 작은 정순이는 첫 아들 재겸이의 돌잔치를 겨우겨우 치르고 죽었다. 재겸이 아빠는 한동안 정순이의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대신 업데이트했다. 재겸이가 혼자 운동화를 신은 사진을 올리며 그는 짧은 글을 썼다. “재겸이 엄마가 사준 운동화다. 그런데 겸이가 짝짝이로 신었네. 혼자 신발 신은 거 알면 정순이가 참 기뻐했을 텐데.” 나는 죽은 친구의 아들 사진을 종종 들여다보며 울었다.


중학교 친구들 중엔 부잣집 아이들이 많았다. 수진이는 ‘포항지업사’ 딸이었다. 

“엄마, 지업사가 뭐야?” 나는 회사를 다니지 않는 아빠가 있다는 것이 어째 낯설었다. 


‘독일안경원’이었는지 ‘서독안경원’이었는지 그집 딸은 도도하기 짝이 없는 새침떼기였고 ‘훼미리부엌가구’집 딸 주연이는 어찌나 예쁜지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주연이는 또래 친구 중에서 유일하게 첼로를 켜는 아이였다. 나는 좁아터진 그 가게 주인이 왜 부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반장이었지만 우리 엄마는 어머니회 모임엘 도통 나가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엄마들이 번갈아 우리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유, 그 반에 부잣집 애들 많잖아. 서령이 엄마가 뭘 부담을 가지고 그래. 그냥 나오기만 해요, 네?” 


시장 앞에서 금방을 하던 친구야 말할 것도 없었다. 엄마는 그 금방에서 내 시계를 사주었다. 친구 엄마는 한 반 친구라서 값을 많이 깎아주었다. 까만색 가죽줄이 달린 반짝반짝하던 시계가 얼마나 예뻤던지. 이제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친구는 셀 수 없이 많은 시계를 번갈아 차고 학교엘 왔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엄마는 입학 선물로 목걸이를 해주었는데, 아마 그것도 그 금방에서였을 거다. 


진이의 아빠는 가고파극장에서 그림을 그렸다. 영화 포스터 대신 그리던 그 그림 말이다. 가고파극장 바로 옆에서 살던 진이는 그래서 아주 어릴 때부터 모든 영화를 다 공짜로 볼 수 있었다. 친구들 중에서 제일 예쁘게 옷을 잘 차려입던 진이는 홍콩영화를 좋아해서 중문과엘 갔고 지금도 통역 일을 한다고 들었다. 


문학회 친구였던 머슴애 원길이의 엄마아빠는 시장에서 커다란 옷가게를 했다. 시장 바로 초입인 데다 매장이 아주 넓었다. 두툼한 겨울점퍼와 모자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가게였다. 우리 엄마는 그 집 외동아들 원길이가 그저 착하기만 하다고 예뻐하면서도 가끔 원길이를 쥐어박았다. “야, 이노무 시키야. 니가 공부만 좀 열심히 하면 느그 엄마가 니를 얼마나 이뻐하겠노. 아들 하나 있는 기 이래 처놀기만 하믄 우째.” 


한문학원에서 만난 오빠도 한 명 있었다. 이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공부도 잘하고 참했던 오빠는 나에게 가끔 벙어리 장갑 같은 걸 쥐여주곤 했는데 알고보니 시장통 골목에서 내복가게를 하는 집 아들이었다. 그러면 엄마는 또 내 손을 잡고 그 가게에서 내복을 샀다. 나에게 준 벙어리 장갑도 똑같은 걸로 수십 개가 쌓인 가게였다. 나는 행여 오빠가 제 엄마 몰래 집어온 것일까봐 코트 주머니에 장갑을 안 보이게 쑤셔넣었다. 오빠네 엄마는 내복을 사면 양말을 덤으로 얹어주었다. 


친한 언니네 집은 시내에서 냉면집을 했다. 고등학교 입시에서 떨어졌지만 먼 시골 어디 후기 고등학교를 거쳐 다시 포항시내 명문고등학교로 전학을 해 왔다. 잔디를 깔아준 거라는 둥 선생들 차를 사줬다는 둥 말이 많았다. 어쨌거나 소문난 부잣집이었다. 


어느 소도시에나 있는 런던제과, 뉴욕제과 등도 포항에 있었다. 그 중 제일 큰 빵집이 ‘시민제과’였는데, 다른 도시의 오래된 빵집이 파리바게뜨 등쌀에 다 주저앉았을 때에도 시민제과는 퍽 오래 버텼다. 그집의 팥빙수와 생크림빵은 정말이지 끝내줬다. 물론 시민제과도 이제는 없다. 


친구 지희는 딱 보아도 감탄이 나올 만큼 예쁜 아이였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지희와 상희, 이렇게 내내 셋이 붙어다녔는데 지희나 상희나 어찌나 키가 크고 예쁜 아이들이었는지 나만 콩알만한 게 옆에 붙어서 쫄쫄쫄쫄 같이 떠들면서도 걸핏하면 짜증을 냈다. “니들이 너무 크니까 나도 모르게 자꾸 발뒤꿈치를 들잖아!” 한동안 지희가 시민제과집 딸이란 소문이 돌았다. 지희가 투덜거렸다. “왜 그런 소문이 났는지 모르겠어. 우리 아빤 라피도 하는데.” ‘라피도’는 스포츠용품을 파는 브랜드 매장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겨울점퍼를 라피도에서 샀다. 키 작은 여자애에겐 그다지 어울릴 만한 것이 아니었지만 친구네라서 그랬다. 


상희는 나중에 ‘사랑의 스튜디오’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화살표를 하나 빼고 몽땅 다 받았던가 그랬다. 정말 예쁘긴 했다. 


수청이는 아, 이름이 가물가물하다. ‘황제라사'였던가. 양복과 셔츠를 만드는 가게였지만 엄마는 도저히 그 집만큼은 갈 수 없다 했다. “그래도 남자 양복은 갤럭시지.” 가끔 수청이는 가게에 두는 카탈로그를 가져와 나에게 보여주곤 했다. “이건 뽀이들 옷이야. 나비넥타이 이렇게 매고. 간호사 옷도 만들어. 옛날엔 양복 많이 했는데 요즘은 뽀이들 옷이 제일 잘 나가.” 


인숙이네는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뒤 집 한귀퉁이를 고쳐 떡볶이집을 열었다. 떡볶이 국물을 얹어주는 인숙이 엄마의 부추전은 정말 맛있었다. 인숙이와 친한 친구라고, 인숙이 엄마는 내가 가면 조그만 가게의 테이블에 앉는 대신 방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인숙이 동생들이랑 따끈한 방에 같이 앉아 떠들면서 떡볶이 국물을 얹은 부추전을 찢어 먹었다. 아빠만 믿고 엄마가 살림만 할 때보다 훨씬 낫다고 인숙이가 말해 주었다. 내가 보아도 그런 것 같았다. 학교 앞 인숙이네 분식집은 늘 복작거렸다.


이제 포항에 가면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냐는 듯 황량하다. 


시장의 옷집도 내복집도, 금방도 부엌가구집도, 그리고 맞춤복집도. 그곳들은 아주 오래된 동화처럼 사라졌다. 경북서점 앞에서, 시민제과 앞에서, 그리고 우체국 계단 앞에서 마냥 기다리던 소녀 시절의 약속들도 다 사라졌다. 


그 아름다운 가게들은 이제 없다. 어떻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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