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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가 김서령 Nov 14. 2017

반지 이야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에 대하여


작년, 코오롱 사보에 실었던 짧은 에세이다.
지나간 글들, 다시 읽어볼 때에
가슴 한 켠 공연히 아련해지는 구석이 있다면
그건, 그 시절에 미련이 남았다는 거다.
나는야 미련쟁이.

어쨌거나 이 글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반지 이야기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소설가가 될 거예요.” 대답하기 시작한 게 열 살 부터다. 

소설가는 가난할 테니까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직업을 하나 더 갖고 싶었던 적은 있었지만 내 꿈은 언제나 소설가였다. 그랬던 꿈을 나는 잠깐 접은 적이 있었다. 


서른 살이었다. 

데뷔를 기다리는 시간이 이제 지겨웠고 다 부질없다 느껴졌고, 또 내 재능으로는 소설가가 영영 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안 써, 다시는 안 써, 생각했다. 그리고 착한 직장인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는 그 무렵 호주에서 지내고 있었고, 소설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것 외에는 비교적 평온했다.      


착한 직장인이 되기로 마음먹은 기념으로 나는 일년동안 돈을 모아 엄마에게 반지 하나를 선물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일년을 보낸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트렁크 안에는 몇 부인지도 모르고 산 깨알 만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들어 있었다.      


엄마가 그 반지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는 아마 설명이 필요없겠지. 엄마는 둘째딸이 이국 땅에서 돈을 아껴가며 반지를 샀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했다. 


“배고플 때 밥이나 사먹지. 이깟 반지가 뭐라고. 여행이나 원없이 다니던가. 이게 뭐라고.” 


한국에 비한다면 호주의 다이아가 가격이 훨씬 싸고, 그 다이아가 진짜 깨알 만한 크기라는 건 엄마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후에 언니나 여동생이 엄마에게 몇 번이나 반지를 해주니 마니 한 적이 있었지만 엄마는 단칼에 거절했다. 나는 둘째가 해준 다이아 반지가 있어, 엄마는 큰소리로 말했다. 


내 결혼식을 치르면서도 “엄마, 내가 쌍가락지 하나 해줄까?” 물었지만 엄마는 버럭 소리쳤다. 쓸데 없는 소리 말라고, 나는 다이아 반지도 있는 사람이라고.     


엄마는 반지를 아껴아껴 꼈다. 평소에는 꽁꽁 감춰두었다가 어디 나들이라도 갈 때가 되어서야 꺼냈다. 그랬던 엄마가 반지를 잃어버렸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의 일이었다.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거제도행 관광버스를 탔다. 다이아 반지를 끼고서였다. 동네 어른들을 가득 태운 버스는 거제도를 한 바퀴 돌았고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그곳을 출발했다. 엄마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반지의 다이아가 홀랑 빠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거제도로 돌아가봐야 찾을 방도가 없었고 버스 안의 불을 다 켜고서 친구분들과 함께 버스 바닥을 샅샅이 훑었다. 허사였다. 엄마는 다이아 알갱이가 빠진 반지를 끼고 허망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 길로 엄마는 앓아누웠고 다이아를 잃어버린 자책으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옆에서 어쩔 줄 모르던 아버지는 “혹시 집에서 잃어버렸던 건 아닐까? 내가 한 번 뒤져볼게.” 엄마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말만 반복하며 공연히 집안을 서성였다. 엄마 눈에는 그런 아버지가 더 짜증스러웠을 테고.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아버지는 진공청소기 먼지통을 다 들여다보았다. 물론 없었다. 


다음날 아침 아버지는 싱크대 거름망을 뒤졌다. 마당 수돗가로 들고 나가 물을 살살 흘려보내며 훑은 거다.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그 안에서 다이아 알갱이를 찾아냈다.     


나는 마당 수돗가에 쭈그리고 앉아 거름망을 살살 흔들고 있었을 아버지의 등을 가끔 생각한다. 드디어 다이아 알갱이가 반짝였을 때 아버지는 얼마나 우쭐했을까. 


“야아! 이거 봐! 여기 있잖아! 내가 뭐랬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을 아버지.      


그 이야기를 전해듣고 나는 코가 아주 많이 찡해졌다. 다이아를 찾은 건 정말 다행이었다. 깨알 만한 다이아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엄마가 느꼈을 그 미안함을 잘 알아서였다. 


내가 소설가의 꿈을 꾸는 동안 딸이 가난해질까봐 늘 마음 졸였던 엄마를 잘 알아서, 내가 이제 평범한 직장인이 되겠다 말했을 때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아주 많이 안쓰러워했을 엄마를 잘 알아서였다.      


엄마는 반지를 이전보다 더 아껴 꼈다. 금방엘 가서 다이아를 잘 붙인 뒤에도 몇 번이나 흔들어보며 확인을 했고 집을 나서고나면 수시로 반지를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집에 돌아오면 신경질을 부렸다. 


“내가 이놈의 반지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하루종일 아무 것도 못했네.” 


그렇게 말이다.      


나야말로 엄마에게 미안하단 말을 못했다. 

마음 졸이게 해서 미안해, 안쓰러운 마음 들게 해서 미안해, 엄마. 그 말을 못해서 더 미안하지만 어쩌면 앞으로도 못할지 모르겠다. 


요즘은 희한하게도 “엄마!” 부르기만 해도 저기 등뼈에서부터 서늘하고 짠한 기분이 올라오니 말이다.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잘 하는 여자가 될 때까지 그냥 내 옆에 있어주었으면. 그러니까 내가 한참 더 자랄 때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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