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바꼭질

"넌 높은 곳을 좋아하는구나!"

by 윤작가

이 애는 그 녀석과 또 다른 놈이다. 몸통이 길쭉하고 다크 초컬릭색. 그 녀석보다는 온순하고 동작도 아주 민첩하진 않다.


어젯밤 화장실 가려고 불을 켠 순간 거실 화장대 맨 위 숨죽이고 있는 녀석을 보았다. 파리채를 날렸으나 실패.


행여 그 놈이 들어올까 방문을 꼭 닫고 잠을 청했다. 아침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아 내심 긴장을 놓치지 않은 채 출근 준비를 한다.


점심은 간단하게 튀김우동으로 때우자. 가스불 켜려고 밸브를 돌리는데 뭔가 이상하다. 나뭇잎같은 게 붙어 있네. 하.. 내 심장도 강해졌구나. 얘는 나에게 쓴소리 왕창 써두고 달아난 바퀴씨는 아니네.


상대해 볼 만하다. 지금 집은 오래되어 올해 들어 부쩍 곤충 천국. 오 마이 갓! 아버지, 제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에프킬라는 자체 전면 금지. 나는 친환경주의자로 변해가는 중. 사실 에프킬라 뿌리면 뒷처리가 더 골치다.


이 아이는 높은 곳을 상당히 좋아한다. 암벽타기 선수 마냥 가스관을 슬림하게 쫓아 그 뒤로 몸을 숨긴 채 높은 곳으로 이동한다.


"한번 해보자는 거네?

에이, 또 놓쳤네!"


노련한 바퀴씨 마냥 퍼드득 날거나 먼저 공격하지 않는 온순한 성질에 좀 불쌍하기도.


부엌에 뒷문이라도 있으면 고이 보내드리는 건데. 이 놈은 숨어 있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다. 언젠간 모습을 나타내겠지.


그래, 너 시간 벌었다, 야~


오늘은 생태계의 비밀을 하나 깨달았네. 이 아이를 찾으려면 높은 곳을 바라보면 된다. 아, 곤충과의 동거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난 권정생 선생님처럼 생쥐 품에 끼고 자지는 못한다. 그래, 넌 내 손으로 처리 가능하니 조만간 끝장낸다. 미안해. 그러게, 왜 우리집에 와서 이 고생이냐.


퉁퉁 불은 면 먹고 오늘도 안녕히!


p.s. 둔하고 미련한 건지, 순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건지.. 신념이 강한 아이였다고 해두자. 결국 밸브 위에 모습을 보였다. 어제 오늘 합쳐 파리채 스매싱 네 번째, 결국 운명을 달리한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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