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진영 Apr 27. 2018

 '더 나은' 이야기를 찾는 일

<라이프 오브 파이>를 다시 보고


<라이프 오브 파이>가 4D로 재개봉됐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본래 4D 따위에 관심이 없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라면 '볼 만하겠다'라고 생각했다. 소감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4D는 ‘갸웃’, 영화는 ‘끄덕끄덕'. 영화 속 상황에 따라 의자가 움직이고 바람이 불고 물이 나오는데, 이런 효과들이 몰입도를 높여주기는커녕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여기서 의자가 이렇게 움직이면 좋을 텐데’, ‘이런 효과를 기획하는 사람이 따로 있겠지?’와 같은 쓸데없는 생각들. * 여기서부터는 스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더 낫다고 생각하세요?"



영화 후반부에서 파이는 전혀 다른 두 개의 이야기를 두고 소설가와 일본인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Which story do you prefer?’


real story가 아니라 better story다. 왜 real이 아닌 better일까.


나에게 <라이프 오브 파이>는 믿음에 관한 영화다. 기독교 신앙을 떠나 믿음이라는 속성 자체를 생각하게 한다. 누군가 내게 "과연 믿음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때 답하는 내용과 맞닿아 있다. ‘어떤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생각하세요?’가 아니라 ‘어떤 이야기가 더 낫다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에 답하는 일.  


라이프 오브 파이는 여러 가지 요소로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는데 그중 으뜸이었던 것은 바다처럼 보이는 하늘과 하늘처럼 보이는 바다였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모습이 바다인지 하늘인지 알 수 없고, 그걸 분간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영화가 파이를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졌으므로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둘 중 무엇을 ‘더 나은 이야기’로 선택할지 고민하게 된다. 나는 첫 번째 이야기를 택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영화가 첫 번째 이야기를 하는 데 훨씬 더 긴 시간을 할애해서인지(이게 뒤에 나올 반전을 위해서라고 해도) 더 가깝게 느껴졌고, 두 번째 이야기는 파이가 그럴싸한 이야기를 원하는 일본인을 위해 만든 거라는 느낌이 강했다. 이 또한 나의 better겠지…  


나한테 ‘좋은 책’이란 재미있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은 책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재미있거나 의미 있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한다. 훌륭한 책이나 영화가 대개 그렇듯이 <라이프 오브 파이>는 두 요소를 모두 충족한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내가 영화 <예수는 역사다>를 보고 쓴 글과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고 나서 느낀 바가 일맥상통한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시기가 맞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이야기가 한 지점에서 만나는 것. 아주 좋아한다. 나에게 '더 나은 이야기'를 찾는 일. 지금껏 해왔고, 앞으로도 할 일이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이전에 봤던 신형철 평론가의 글이 떠올라서 다시 찾아봤다. 파이 이야기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해석하는데 일면 도움이 된다.

 

여기서 신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유구한 논쟁은 별로 의미가 없다. 존재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인 테리 이글턴은, 전투적인 유물론자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인 기대와는 어긋나게도, 2000년대 중반 이후 새삼스럽게 등장한 호전적인 무신론자들(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등)에 동의하지 않는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열정적인 에너지를 바치는 그 무신론자들이 맹목적인 근본주의를 격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통쾌하지만, 그들의 이성에 대한 맹목적 신뢰는 그들이 조롱하는 저 근본주의자들 못지않다는 것이 이글턴의 생각이다. 그러는 와중에 그들은 우리의 삶을 더 깊은 수준에서 사유하는 길을 봉쇄해버린다는 것.

파이가 들려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는 또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타인의 자기 해석에 대해 우리는 또 어떤 해석을 시도해야 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물음과 같은 물음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극 중 소설가와 일본 선박 회사 직원들에게 던져진 물음이기도 하다.  

[신형철의 스토리-텔링]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십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사실을 확인하면 믿을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