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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진영 Mar 29. 2018

사실을 확인하면 믿을 수 있을까?

영화 <예수는 역사다>


영화 <예수는 역사다>의 주인공 리스트로 벨. 신문사 기자인 그는 '사실을 통해서만 진실로 갈 수 있다'고 믿는다. 보이지 않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비(非)이성적인 아내가 영 못마땅하다. 예수의 허구성을 증명하여 하루빨리 아내를 이전으로 돌려놓고만 싶다.  



리 스트로벨은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 예수의 부활이 거짓임을 밝히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자신이 의심한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하고도 여전히 믿지 못하는 리 스트로벨. 과연 그가 말하는 진실에 이르는 사실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사실을 전부 안다는  가능할까



수많은 논객과 학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하나의 진실을 보지 못할까. 그게 정말 가능하다면 우리는 진즉 진실을 보지 않았을까.  


오랜 시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을 둘러싸고 여러 이야기가 생기고 사라졌다. 지금도 신자들과 무신론자들은 저마다의 사실과 논리로 경합을 벌인다. 이런 상황이 수 세기 동안 계속되는데 왜 전부 아는 사람은 없는 걸까.  


맹목적이기만 한 믿음도 있겠지만,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타인을 평가하고 운운하는 사람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렇게 경멸하는 신자들의 선민의식이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다른가.



모든 사실을 알아 진실에 이른 사람은 없다



신자든 비(非) 신자든 마찬가지다. 각자에게 ‘충분한 앎’만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을 완벽히 알고 믿는 사람이 없듯이 전부 알아서 안 믿는 사람도 없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있다고 믿느냐 없다고 믿느냐’의 문제다.


많은 간증 서사가 그렇듯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도 주인공이 회심하며 끝난다. 하지만 그를 변화시킨 건 그가 원한 사실이 아닌 자기를 사랑으로 기다려 준 아내와 주변 사람들이었다.  





"주변인들의 인내와 조언이 진리를 찾는 여정의 이정표가 되고 미처 깨닫지 못했던 친아버지의 사랑,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아내의 사랑이 하나님이 사랑의 은유였듯이...." (영화 소개글에서 발췌)




비(非)신자가 이 영화를 본다고 해서 믿게 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여기에 나오는 사실이나 주장을 반박할 만한 이야기도 넘쳐 날 테고 설령 그게 모두 사실이고 그걸 확인했다고 해도 믿을 수 없을 거다. 주인공 리 스트로벨이 그랬듯이. 그리고 무엇보다 믿음을 갖는다는 건 그렇게 쉽고 간단하지 않으니까.  


만약 이 영화를 통해 객관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예수는 역사다>라는 제목부터가 너무 그런 기대를 심어주고 있지만….


그 어떤 현자라 해도 사실로 설득해서 믿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 믿음을 갖게 하는 건 믿고 싶다는 마음이고, 그 마음을 만드는 건 결국 삶과 사랑뿐이다. 내 삶과 사랑하는 모습이 하나님 사랑의 은유로 나타나는 것. 예수의 흔적은 논리와 사실이 아닌 사람과 삶을 통해 드러난다. 오직 그것만이 믿음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 영화 속 리가 그랬고, 내가 그랬듯이.  


영화 속 주인공을 보면서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나는 오랜 시간 진리 주변을 맴돌면서 의심했고 질문했다. 기적과 같은 어떤 황홀경을 경험하면 믿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하지만 기적은 말 그대로 기적이기에, 쉽게 오지 않았다. 특별한 체험도 없었다.  


"나는 안 되는 거구나..."

"나에겐 기적도, 특별한 경험도 없구나"


하며 포기하고 서럽게 울던 그 순간,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특별한 경험이었다. 특별한 경험을 하면 당연히 믿음이 생길 거라 여겼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때부터 내 의심은 다시 시작됐다.  


'나의 강한 열망이 만들어 낸 환상은 아닐까'

'그냥 내 마음의 소리는 아니었을까'


사실을 확인하고도 믿지 않았던 리처럼, 기적을 경험하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던 나도 믿지 않았다. 내 믿음의 조건은 사실이나 특별한 경험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믿음이 시작된 건 기적을 경험한 그때가 아니라 믿기로 한 그 순간부터였다. 내 경험을 오랜 시간 나와 함께 고민하던 친한 언니에게 털어놨고,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들었을 때는 이렇게 확실한 게 없는데? 네가 경험하고 느낀 거잖아. 그걸 믿어"


그토록 원하던 특별한 경험을 했지만, 믿지 못했고 오히려 의심을 걷어내고 내가 경험한 것을 믿기로 한순간 믿음의 길이 열렸다. 오랜 시간 옆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진리가 나에게 들어왔고,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맞춰지는 경험을 하며 ‘충분한 앎’을 경험했다. 그 이후로 내가 전부를 알지 못한다는 것과 해답이 없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아, 그게 이 뜻이었구나'

'그때 그분이 말씀하신 게 바로 이거였구나'


시간이 더해 갈수록 과거에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이 이해되는 짜릿함을 경험했고, 믿음의 선진이 남긴 고백들, 성경 말씀, 노래 가사가 전부 내 얘기처럼 들렸다. 그야말로 드러난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해답을 가졌다는 것이
믿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무런 해답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스물다섯이었나. 김병년 목사의 책 <나는 당신이 좋아>에서 보고 메모해 둔 글귀다. 영화를 보고 믿음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다시 떠올랐다. 나는 해답을 원하는 비신자들에게 혹은 '이해해야 믿을 수 있다'는 사람들에게 나처럼 일단 믿으라고 하거나 믿음을 간절히 원하라고 하지 못하겠다. 그게 얼마나 말 안 되고 어려운 건지 잘 아니까. 그저 나의 믿음에 대해 묻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영화 속 리의 고백처럼.  



"제가 모든 걸 알 순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겠죠. 하지만 충분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믿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올지 저는 모릅니다. 그 뜻도 모르겠지만 제가 원한다는 건 압니다. 그러니 행하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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