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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경 Apr 26. 2021

영화 미나리에 대해 쓸 때가 되었다

영화 미나리를 본 내 생각에 대해 쓸 때가 되었다

경사스러운 날이다. 국경일로 지정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이는 좀 냉소적인 말이기도 하다. 뭐가 어쨌든, 국경일로 지정할 만큼 좋은 일이 생긴 일이라는 점은 변함없다. 윤여정 배우의 수상을 축하하며, 윤여정 배우의 수상과 아주 미비한 관련이 있는 (고작 영화를 봤다는 점이 전부인) 내가 미나리에 대해 써 보려고 한다.


수작이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마음에는 저 네 글자가 선명히 떠올랐다. 입을 여니까 나온 소리는 한예리 짱이지 않니, 윤여정은 최고다, 이게 대체 무슨 영화니, 구도가 너무 좋다, 장난 아니다, 한예리랑 윤여정한테 나라를 주고 싶다, 이루 말로 할 수가 없다, 대체 한예리는 어쩌면 저렇게 단단한 사람의 얼굴을 보여 주는 걸까, 윤여정은 어떤 인생을 걸어 왔길래 그냥 순자 그 자체로 분할 수 있는 내공을 지닌 걸까, 앤을 연기한 배우는 이름이 뭐지, 정말 말도 안 되게 대단한 배우다, 이상하게 나는 딸에 이입이 되더라, 장녀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인 걸까. 이 외에도 영화 속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내 입에서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만 나온 것은 (물론 대부분의 영화를 보고서 여성 배우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그들의 연기가 훌륭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끝나기 전 상영관의 문을 열고 들어온 청소원과 눈이 마주쳐서다. 영화가 끝나기 한참 전, 영화 자체 러닝 타임이 20분 가량 남았을 때 여성 청소원이 들어오셨다. 쏟아지는 빛에 그 분과 눈이 마주쳤고, 후다닥 맨 뒷 줄에 앉은 그 분과 영화를 마저 감상했다. 여운이 남아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은 덕분에, 그 분은 뒤에서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마저 모두 보아야 했다. 그 분은 미나리의 마지막 20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미나리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여자들이 꾸려나간 이야기다. 살림을 도와 주러 먼 한국에서 오는 순자가 바로 그 예시다. 여우조연상을 받았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순자가 아파야 한다는 점이 화가 났다. 하필 가장 나약한 존재를 통해서 삶에 있는 고난의 민낯을 드러냈다는 것이 좀 화가 났다. 어째서 결국에, 이렇게 궁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팔자가 꼬이게 됐을까. 깨지고 부서지고 불에 다 타 버린 마음을 어째서 순자를 통해서 드러내야 하는 걸까. 그리고 다시 한 번 봤을 때는, 어렴풋이 어째서 순자여야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감독의 의도고 뭐고, 내 마음에서 발행한 이해와 납득일 뿐이다.

순자는 그 나이까지 한국에서 살며 근현대부터 현대를 살아오는 한국 여성이라면 겪을 모든 풍파를 받아들이고 살았을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만리타국에서 마음 고생 몸 고생 생고생을 하고 있으니 몸에 탈이 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나. 아플 수밖에 없는 환경인데, 아프지 않은 걸 보고 안도하는 마음이 오히려 순자를 더 지워 버리는 게 아닌가. 알량하고 편협하지만 주제 의식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순자의 몸으로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면서 마음 아프고 효율적인 일일 것이다.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나면,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 시작한다. 가부장적인 시선인가? 애초에 순자를 고생하게 만든 것이, 그게 전부 다 잘못된 거 아닌가? 그럼 모니카는. 되도 않는 사업 하겠다고 까부는 남편 슬하에 애까지 둘을 낳아 줬는데. 모니카의 인생은? 그리고 와중에 이 모든 것을 학습하고 있을 앤은 누가 지켜 주나? 어른스러운 아이가 되어 버린 앤의 유년기는? 딸의 유년기는 또 이렇게 지워지고 착취당하는가?


그래, 결국에 가부장제는 썩었다라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나의 한계이자 편협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여전히, 미나리는 수작이다. 여태까지 내가 같이 살아 온 나라면 미나리라는 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고, 이 영화를 보고 울 수밖에 없으며, 영화와 공명점을 같이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원더풀 미나리라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미나리 앞에 붙여 줄 수 있는 수식어는 수작 하나밖에 없다. 원더풀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하면, 자꾸만 순자와 모니카가 떠오른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원더풀이라는 단어 아래에 짓눌렸을까.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원더풀이라는 단어가 더러워지지 않게 쓸고 닦으며 인생을 바쳤을까. 찢어진 틈을 기우고, 또 메꾸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숨죽여 살았을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입이 쓰다. 그리고 여전히 흘러간 여자들에 대해 말하고자 할 때면 어불성설을 내뱉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실감할 때면, 그 입은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유러피언 사람들이 내 이름을 틀리게 말했지만 오늘 그 모든 죄를 사하노라, 하는 아시안의 수상 소감은 여전히 들을 때마다 묘한 쾌감이 인다. 이유를 파고들자면 꽤나 씁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트 있는 펀치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자주 저 말을 수상 소감 중 일부로 들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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