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암으로 떠난 나의 벗.
대학시절 전과생이었던 친구가 있었다. 나와 비슷한 체격으로 성격도 유사한, 쌍둥이 같은 녀석이었다.
느지막이 3학년 동아리 활동으로 더욱 절친이 된 우리는 졸업 후에도 가족이상으로 꽤 우애 깊게 지냈다.
그녀는 학교 사회사업실에 전문상담사로 일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퇴근 후 각자의 하루를 곱씹으며 수다 삼매경에 빠지곤 했다. 직장 상사 이야기, 연애 이야기, 결혼 이야기 등..
그리고 내가 먼저 결혼과 육아를 시작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그녀는 나의 육아 메이트가 되었다.
직장에서 동갑내기와 덜컥 결혼을 하고, 첫 아이 임신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아무도 나에게 육아와 출산에 대해 조언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통잠을 당분간 잘 수 없다는 것과 내 집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점차 사라진다는 아주 단순한 진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산후우울증이 찾아와 암막 커튼을 한 채, 하루 종일 우는 아이를 쳐다보며 어쩔 줄 모르는 초보 엄마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보잘것없는 모성애를 '모유 수유'와 '천 기저귀 사용'으로 시험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가.
온전하고 건강한 사랑을 받지 못한 나는, 아이에게 모성애 가득한 어미가 되어보겠다고 머리를 굴린 짓이 모유 수유와 천 기저귀였다. 하지만 그땐 알지 못했다. 그것이 더욱 나의 우울증을 깊게 만드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남편의 식구들, 특히 시누이에게 못난이라 놀리며 환영받지 못한 (출산 후 처음 아이와 함께 간 시댁형에서 젖을 물리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의 첫 딸을, 내 친구 그녀가 친조카인 양 살폈고 사랑했다. 첫 아이의 돌잔치 준비에도 남편보다 더욱 열성적이었으며, 그 당시 흔치 않던 캠코더도 회사에서 몰래 빌려 올 정도의 열의를 보였고 그녀와 난 나름대로 만족하며 돌잔치를 마쳤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 첫 아이를 공동육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1년의 시간이 흘러 둘째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고 제일 먼저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다시 걸었지만, 그날 저녁도 다음날 아침에도 전화연결은 되지 않았다. 아직 손이 많이 가던 첫아이의 육아와, 둘째 아이 입덧으로 정신이 없던 나는 그래도 더 집요하게 연락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삼일 째 되던 날, 그녀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연락이 왔다.
"야, 나 혈액암 이래. 백혈병 알지? 드라마에 막 나오는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거. 병원이어서 전화 못 받았어."
무심코 내 입에서 나온 거친 말.
"미친년. 장난하냐, 며칠 어디서 잠적하고 와서 지랄이야? 남자 친구랑 싸웠냐?"
라고 총알처럼 뱉어버렸지만, 휴대폰 너머 분위기는 어두웠고 스산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났을까.
비가 추적이는 장마의 시작을 알리던 날, 나는 둘째 아이를 출산한 지 한 달 만에 그녀의 장례식에서 조문객을 맞이하며 그녀를 떠나보내고야 말았다.
그녀의 나이 고작 서른이었다.
"좋겠다, 넌 여전히 서른 살이라서."
그렇게 응급실에서 '백혈구수치'라는 단어는 그녀를 소환해 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마흔.
그녀를 떠나보낸 지 10년이 되었고, 그녀는 서른의 꽃다운 모습으로 영원히 나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
곱씹어보니, 내 곁을 예고 없이 떠난 두 사람이 얄궂은 날이었다. 하지만 난 그들을 따라나서면 안 된다.
때론 엿같고 억울한 일이 나를 괴롭히지만 내 지구 여행은 계속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