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와 농약.
아침 7시가 넘은 시각, '카톡'이 울린다. 보통 이 시간에 카톡을 보내는 사람은 엄마나, 광고 메시지이기에 확인을 미룬다. 아이들의 등교 후 미리 보기로 본 카톡은 얼마 전에 이혼을 알렸던 남동생이었다. 기분이 별로였다. 또 무슨 부탁을 하려나 싶어 , 조금 더 미루고 싶었다. 하지만 열어 버렸다.
처음 사진을 보면서 가장 임팩트한 부분은, 소주도 아니었고 농약은 더욱 아니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나와 내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잘 살고 있을 거라 믿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화자는 바로 생부라는 사실을 아는데 몇 초 걸리지 않았다.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
소름이 끼쳤다.
몇 년 전 내 남편의 부고소식을 들었음에도 남의 일처럼 여기며 다시는 내 소식을 전하지 말라며 고모에게 오히려 꾸지람을 했던 사람.
이 모든 인생의 소용돌이의 시작이 '그'라 믿고 있는 나에게, 내 이름을 부르며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오버액션을 취하고 있다.
단순히, 일어나는 '분노'가 아니라 머랄까, 어휘력이 부족한 탓인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생경한 기분과 마음이 휘몰아쳤다. 그런 메시지를 나에게 전달하는 남동생도 차단하고 싶었다.
결국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며칠이 지났고 며칠 동안 또 다른 소식? 은 들리지 않았으니 그저 show였음이 증명된 셈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동생도 나에게 알리지 않았다면 혹여 재수 없게 생길지 모르는 사고에 나라도 끌어들이지 않으면 불안했던 모양새다.
show.
30년 만에 피붙이의 이름을 부르며 벌인 쇼가, 농약이라니. 자살 유가족으로 미망인이 되어 살아내고 있는 딸에게 같은 방법으로 협박을 하다니. 정신질환이 확실해지는 찰나이다.
우리가, 아니 30년 전에 자기가 잘라내 버린 딸내미가 달려가서 잡아주길 바랐나? 어떻게, 내 이름을 부를 수 있지? 감히 내 안부가 왜 궁금하지?
하루 종일 머릿속에, 아니 솔직히 며칠 내내 나를 툭툭 건드렸다. 하지만 나는 과거의 나와 달리 이 show를 안주삼아 술잔을 들지 않았다. 그저 덤덤히 일상을 지켜내며, 그렇게 책을 펼쳤다. 그리고 울어버렸다.
프리드리히 니체 아포리즘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갈 수 없다.'
터무니없는 일을 당해도 마치 축제에 참가한처럼 즐길 것.
침착한 눈동자와 확고한 발걸음으로 인생을 밟을 것. 터무니없는 일을 당해도 마치 축제에 참가한 것처럼 즐길 것. 미지의 세계와 해양과 인간과 신들을 기대하며 인생을 지켜볼 것. 마치 그 미지의 세계를 지키는 병사와 선원들이 잠시 동안의 휴식과 즐거움으로 피로를 잊는 것처럼 혹은 이 찰나의 쾌락 속에 인간의 눈물과 진홍색 우수를 잊는 것처럼 밝은 음악에 귀를 기울일 것.
맞다. 이것이 인생의 고수버전이다.
각자의 인생살이 속에 다들 터무니없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우리 브런치에도 얼마나 터무니없는 숙제들로 고통 중인 작가님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숙제들을 해결해 나가고, 때론 숙제와 한 몸이 되어 걸어가야 하는 그 길에 쉼이 되고, 쉼터가 되고 정자가 되어주는 이곳에서 우리는 울고 웃는다.
그런 생각들이 뒤엉키며 사실 며칠 내내 모른척했던 감정들을 쏟아내듯, 그렇게 스벅에서 혼자 울어버렸다.
그리고 몇 년 전 마음먹었던 '두 개의 심장'으로 살리라, 했던 나의 마음가짐의 결이 '인생을 밟을 것'이라는 구절과 닮아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터무니없는 쇼가 진행될지 가늠할 수 없지만, 우리는 고수가 되어 인생을 꿋꿋하게 지르밟으며 축제에 참가한 참석자 버전으로 살아가보자.(살아가보아요^^)
이번 쇼를 통해, 나는 알아간다.
'내가 생각보다 더 많이 나를 아끼며 살아가고 있구나. 잘하고 있어, oo아.'
[니체]님이 나를 살렸다. 무한 감사드린다.
[브런치북] 이혼하자고 했더니 별이 되었다_2 (brun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