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람은 죽지 않고 사는지.
“근데 그러고 보니 요즘은 너 그 말 안 하더라?” “나? 무슨 말?”
“왜 사냐는 말.”
“내가 그랬나?”
“응. 근데 이젠 좀 뭐라해야되지, 개운해 보인다.”
그 즈음 친한 친구와 대화를 하다 친구가 내게 말했다. 예전에는 가끔 내가 사람이란 왜 사는 것인지에 대해 다른 주제로 대화하다가도 툭툭 얘기하곤 했는데 요즘은 그 얘기를 안 한단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는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구나, 하는 의식이 문득 들었다.
사람이 태어나 죽지 않고 살아가는 데 단순히 죽음에 대한 공포 이외에 무슨 이유가 있는지, 삶이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에 대해.
삶이란 것은 이미 태어났고 존재한다는 의미인데, 선행하는 존재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의식적으로 애써 구하려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나중에 심리학 서적을 읽어보면서 알았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과도한 고찰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우울의 시작이 된다는 것을.
그냥 내 몸과 나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고, 인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굳이 그것에 덧입혀야 할 이유, 목적이나 가치를 찾지 않게 된 것 같았다.
그냥 내가 존재하니까. 지금 숨 쉬고 있으니까. 오늘 가을 공기를 깊이 들이쉬니까. 그러니까 살아있는 거지, 뭔가 대단한 걸 추구해야 한다거나 엄청난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거나 그런 부수적인 목적들을 걷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시선을 연습하기 시작하니 불안감도 많이 잦아들었다.
몸이 뭔가 조그만 이상 신호를 보낼 때, 이전 같았으면 헉, 나 뭐 또 아픈 건가? 왜 아프지? 이런 방식으로는 아픈 적 없는데 혹시 큰 병인가? 빨리 병원 가봐야 하나? 하는 식으로 나 자신을 수동적이고 불안 요소를 내재한 객체로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먼저 몸을 주체로 놓고, 대화를 하고 상태를 자세히 봐주는 연습부터 의식적으로 하게 되었다. 마치 소중한 친구를 대하듯이.
어디가 아파? 오늘 너무 무리했나? 그래, 그 정도면 생각해 보니 좀 무리였을 수도 있겠다. 갑자기 가슴이 막 뛰고 불안해? 아직 괜찮아. 왜 불안한지 생각해 보자.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 정도면 괜찮아. 같이 생각해 보면, 알고 보면 별 거 아닐 수도 있어.
내가 여기 있잖아. 너도 여기 있고.
내가 나를 들여다보고 다독여주는 행위는 생각보다 훨씬 힘이 세다. 아플 때, ‘아 또 왜 아파? 짜증나네. 이 정도도 못 견뎌주나.’ 보다, ‘좀 힘들었구나. 괜찮아, 이번에도 같이 이겨내 보자. 오늘은 좀 따뜻한 거 먹고 푹 잘게. 대신 저녁까지만 버텨 줄래?’라고 말하는 것은, 그냥 나 혼자 하는 자문자답인데도 그날 하루의 기분 자체가 달라진다.
심리학에서 내가 스스로 어린 나의 보호자가 되어줘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내 욕구를 파악하고, 들여다보고, 사랑해 주고. 내가 원하는 보호와 케어를 내가 마음 써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몸과 대화하는 것이나, 심리치료에서 어린 마음속의 나를 케어하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같은 내용이었겠구나, 하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