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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블루 Sep 12. 2022

엄마와 블루투스 이어폰

착한 자식이 되는 것은 어렵다

“요즘 이어폰이 잘 안 되더라?”


침대에 누워 L자 다리를 하고 있는데 엄마가 방에서 큰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별 얘기가 아닌 것 같지만 방금까지 평평했던 나의 미간에는 주름이 지어졌다. 저 문장 뒤에 따로 붙은 문장은 없었지만 대충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이어폰이 잘 안 되더라? 아무래도 이어폰을 새로 사야 할 것 같아.’

이어폰이 잘 안 된다는 말 이후로는 아무 말이 없는 엄마 방을 향해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래서 이어폰 새로 사야 된다고?”

“아무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이어폰을 새로 사야 한다는 확답이 아닌 아마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라는 아까보다 한풀 꺾인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쏘아붙이는 내 말투에 조금 눈치를 보는 듯했다. 나는 ‘아마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라는 문장에서도 또 다른 뜻을 추측할 수 있었다.

‘나는 알아보고 사고하기 어려우니까 네가 사줬으면 좋겠다.’

아까보다 조금 더 구겨진 미간과 한층 더 날카로운 목소리로 엄마 방을 향해 소리쳤다.


“그래서 이어폰을 알아보라는 거야 아니면 내가 구매까지 해달라는 거야?”


엄마가 바라는 것은 아마 이 두 가지 모두였을 것이다. 세상 착한 딸이 되어 정보를 척척 알아봐 주고 구매까지 해주면 정말 좋았겠지만 갑자기 이어폰을 알아봐야 하는 상황도 갑자기 돈을 써야 하는 상황도 달갑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이 오면 나는 짜증을 내고도 착한 딸처럼 행동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곤 한다. 결국 핸드폰 대리점에서 일하는 친척오빠가 사은품으로 나가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나의 마음 한켠엔 속시원히 사주지 못한 블루투스 이어폰이 툭 떨어져 남았다.


성인이 되어가며 엄마와의 대화 패턴은 늘 이런 식이 되었다. 왠지 모르게 요구하는 듯한 엄마의 말과 그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 그리고 마음 한켠에 남는 죄책감. 이런 것들이 쌓여 온 것 같다. 내 마음엔 계속 죄책감이 쌓이고 엄마의 마음엔 내가 할퀸 상처들이 여기저기 남았을 것이다. 나는 엄마를 사랑하고 엄마도 나를 사랑하지만 그 사이에 오해가 가득 쌓여있다.


만약 똑같은 질문을 교회 집사님들이나 이모가 했다면 나의 반응은 어땠을까. 아마도 최선을 다해 반응해드렸을 것이다. 물음에 담긴 속 뜻이 있진 않을까 생각하지 않고 물음을 물음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요즘 이어폰이 잘 안 되네?”

“어머, 이어폰이 잘 안 되세요? 왜요?”

“글쎄, 모르겠어. 한쪽이 잘 안 나오고 안 들리네?”

“그러게요? 연결은 되어있는데 왜 안 들리지? 고장 난 것 같은데 하나 사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야 되나? 어휴.. 기계를 잘 모르는데.”

“요즘 이어폰이 저렴한 것들도 많아서 제가 한번 찾아보고 링크 보내드려 볼까요?”

“그래 주면 고맙지~”


예상해보자면 이런 순조로운 대화들이 오고 갔을 것이다. 엄마의 말에만 그토록 예민하게 반응 해지는 건 왜일까. 생각해보면 교회 집사님이나 이모의 경우는 반응만 해주고 결정에 대한 책임은 당사자와 그들의 자녀분들에게 맡기면 되지만 엄마와의 대화에서는 이미 결정에 대한 책임부터 비용까지 생각하게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오늘 아침 친척오빠가 보낸 블루투스 이어폰이 도착했다. 엄마가 박스를 열어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이건 연결하기도 어렵지?"


이번에도 뒤에 숨겨진 말 뜻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나진 않았다.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엄마가 고장 난 이어폰을 계속 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참 마음이 그렇다. 바로 사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착한 자식이 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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