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두나무

서리에서. 4

by 슬로우모션

"앵두나무라니.. 이건 너무 레트로다. "

"왜 추억 돋고 좋고만.."


이사 온 집에는 지호 키만 한 나무가 세 그루 있다. 포도나무 하나, 전나무 하나, 앵두나무 하나.

아담한 키의 나무들이 집 귀퉁이 한 군데씩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여긴 내 구역이다' 하는 것 같아 얼핏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세 놈 중 다른 나무와는 다르게 앵두나무만큼은 한참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2020년에 앵두나무가 집에 있다니..

뭔가 차원의 문을 넘어간 느낌이다. 드라마에 너무 몰입했나..

KakaoTalk_20200615_130748278.jpg

모르겠다. 어딘가에서는 아직도 집집마다 흔한 나무 일지도 모르겠으나 어릴 적 시골을 떠난 도시 촌뜨기에게 앵두나무 한그루는 앞이 막힌 보라색 엄마 슬리퍼를 신고 코를 흘리며 오빠를 따라다니던 어린 시절의 나를 기억나게 했다.


오빠와 나이 차이가 7살이나 나던 나는 내 친구와 노는 것보다 오빠 친구들 노는 데 따라다니길 좋아했다.

대부분 잘 데리고 다니던 오빠도 매번 나를 챙기기 귀찮았을 게지. 그런 날이면 오빠는 말총머리로 묶고 다니던 내 머리꼬리를 잡아 "꼬리!! 저리 가. 따라오기만 해"라고 소리를 지르고 냅다 뜀박질로(오빠는 육상부였다) 도망을 갔다. 하지만 이내 주저앉아 엉엉 우는 동생이 안쓰러워 다시금 와서 엉덩이를 툭툭 털어주고 데려가곤 했다. 그런 오빠를 알았기에 더 목청껏 울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렇게 오빠와 오빠 친구들을 따라다니며 개구리 터트리기나 뱀을 잡아 뱀집 아저씨에게 갔다 주거나 했는데 그런 심한 여가(?) 뒤에는 늘 맛있는 간식을 먹었다. 지금은 먹기 힘든 산딸기나 오디, 앵두 같은 것들을 따서 신나게 먹었었다. 가시에도 긁히고 모기도 많았던 거 같은데 코찔찔이 동생을 꽤나 잘 챙겨 먹이던 오빠들이었다. 그때는 그게 왜 그리 달던지 그만 먹으라는 오빠들 말에도 씨까지 한 움큼을 삼켜버려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지금이야 애들만 두고 회사 가는 부모가 신고감이지만 그때야 그런 게 있었나.

냄비에 밥 한 솥 해서 두고 가면 엄마, 아빠가 올 때까지 오빠랑 둘이 간장에다 비벼먹고 김에 싸 먹고 하며 김치도 물에 씻어 먹으며 끼니를 때웠다. 그나마 오빠도 본인이 보호자라 생각했던지 나를 굶기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배는 안 곯리고 잘 먹였다.

밥으로만 성이 안차던 어린이들이었지만 슈퍼라곤 산을 넘어가야 있었으니 과자 간식은 먹을 수 있는 날이 손을 꼽았고 온 동네 천지였던 각종 먹거리를 마음대로 아주 많이 먹었던 기억이 있다. 수박 밭에서 수박도 깨 먹고 밤나무에서 밤도 따먹고.. 이런 얘기들을 읽으며 요새 사람들은 그건 도적질이라고 하려나.. 그 시절만큼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집과 집 사이에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었다. 응팔에서 정환이네 집을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이 집 대문을 잠그지 않은 채 막 들락날락하던 그 시절이었으니 앵두나무에서 앵두 좀 따먹은 들, 수박 한 통 아이들이 깨서 먹든 그 일로 경찰서에 가거나 어른들끼리 얼굴을 붉혔던 기억은 없다.

나도 그런 공짜 간식을 무한정 제공받았음에도 지금 내 마당의 앵두나무를 누군가 들어와서 따먹는다면 나조차 웃으며 그러시오 할 수 있으려나 자신이 없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세콤보다 삼엄하고 예민한 경계가 세워진 듯하다.


이사 온 날만 해도 퍼렇던 앵두가 하루 이틀 상간에 화끈해진 날씨 덕에 금방 빨갛게 익었다.

새빨갛고 동그랗고 윤기 나는 아이다.

지호를 불러 앵두를 보여준다.

"이게 뭘까?"

"아기 토마토"

상상도 못 한 대답이다. 그냥 토마토도 아니고 아기 토마토라니..

누구 집 딸인지 어찌 이리 귀여운 대답을...

"아.. 토마토랑 비슷하게 생겼다. 근데 이건 앵두야. 엄마랑 따 볼까?"

어지간한 것에 호기심이 없는 지호가 냉큼 하나를 따 본다. 아마도 빨간색을 제일 좋아하는 지호에게 첫인상이 합격점을 받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또 몇 개쯤 따고는 흥미를 잃는다.

딱 10개만 더 따기로 했다. 놀거리, 할 거리가 많은 자연이라도 지호에게는 다 배움과 지루함의 연속이다. 익숙해지게 조금은 재미있어지게 고민해봐야 한다.

KakaoTalk_20200615_130708821.jpg

"앵두 먹어볼래?"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지호에게 한알을 줬다.

씨를 뺄 줄 모르는 지호는 조금 씹다가 삼켜버렸다.

"지호야 맛있어?"

"엄마 들어갈래요."

맛있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속은 맹숭맹숭한 모양이다. 게다가 중심에 떡하니 씹히지도 않는 씨라니..

예상은 했지만 한 개 먹고는 지호는 바로 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우습지만 약간은 설레는 마음으로 나도 한 알 먹어본다. 역시나.. 그때 그 시절 맛이 아니다.

예전에도 시장에서 오디를 발견하곤 엄청 비싸게 주고 호들갑을 떨며 사 먹었는데 세상 그렇게 아무 맛도 안 날 수가 없었다.

흘러간 시간 동안 너무 단맛 짠맛을 너무 많이 본 내 인생 탓이겠지..


선홍빛 저 동그란 앵두 하나가 시골길을 내달리던 추억으로 이끈다. 이 추억들이 이제는 응답하라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되었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나이로 살아가고 있음을 새삼 느낀다.

별거 없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는 일이 이리 재미나는지 몰랐다. 그래서 어른들이 그렇게 옛날이야기들을 하셨나 보다. 라떼는 말이야.. 앵두를 말이야 씻지도 않고 막 따먹고 그랬다고.. 또 라떼는 말이야...

꼰대는 아니라 스스로 여기지만 복고를 아름답게 여기는 사람으로서 앵두나무에 홀딱 반해버린 오늘.. 6월도 벌써 중순이다.



이전 03화오늘이 가장 젊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