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행복할 때의 두려움

서리에서. 5

by 슬로우모션

요즘은 종종 행복함을 느낀다. (문자로 써 놓으니 아무 느낌도 아닌 것 같네)

평온하고 아무 일이 없고 공간과 그 안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들이 더없이 차분하다.

이럴 때 불현듯 두려움이 몰려온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민스럽고 복잡할 때 '그래 이게 인생이지' 라며 마음의 안정이 찾아온다.

그래 봤자 고작 41년을 살았고 꽃길은 아니어도 누군가는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고 있는데도 꼭 산전수전 다 겪고 있는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모양새를 낸다.


오후반 등교를 하는 지호와 오전에는 밥을 먹고 씻고 마당의 조그만 텃밭에 물을 준다.

처음에는 호스를 들고 어쩔 줄 몰라하더니 이제 제법 골고루 물줄기를 쏘아댄다.

지호에게는 귀찮은 일과 중에 하나지만 이제는 꼭 해야 하는 '할 일'이 되어 버렸다.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을 주는 것, 생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 참을만한 인내를 배움으로 경험을 채워가는 것.. 모두 우리가 이끌어줘야 하는 일들이다.


지호가 물을 열심히 준 덕에 호박도 오이도 토마토도 고추도 열매를 맺고 있다.

노란 꽃이 활짝 피었다 하룻밤 새 사그라들고 열매가 맺힌다.

이곳에 이사 와서 매일같이 보는 초록과 노랑과 빨강이 우리에게 생기를 준다.

메마른 삶에 알록달록 색이 입힌다.

창문 열고 들리는 뻐꾸기 소리를 지호가 대번 알아맞힌다. 지호가 뻐꾸기 소리를 아는지 이번에 알게 되었다.

귀가 열리고 눈이 뜨이고 코가 숨을 쉬는 이 곳이 행복한 느낌으로 가득 차면 나는 또다시 조금 움츠러든다.

요새 들어 급격히 큰 지호의 키 때문인지 자꾸만 혼자 어딘가에 서서 어쩔 줄 몰라하는 지호가 떠올라 눈물이 흐르려는 걸 애써 참아낸다.

이 무슨 궁상이란 말인가..

역시나 촌스럽다.. 누리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노란 꽃이 활짝 피었다 질 것을 두려워하지만 말고 뒤에 올 열매를 기다리는 마음을 갖는 일이 쉽지가 않다.


오늘부터는 지호와 요가를 시작했다. 물론 유튜브로 하는 거지만 굳어져 가는 몸을 이완도 시키고 조여 주기도 하기에 좋은 듯하다. 호흡도 엉망이고 누가 더 뻣뻣한지 대결 같기도 하고 지호가 할 때는 내가 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오늘이다.

내일은 조금 더 세련된 오늘이 되기를. 행복은 누구든 충분히 누려도 괜찮은 것이니까.

이전 04화앵두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