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세번째 맞던 1월의 유난히 춥고 맑은 날이었다. 밤새 뒤척이며 간신히 배에 걸쳐뒀던 이불을 걷어내고 일부러 베란다 창을 조금 열어 숨을 크게 내쉬었다. 새파랗고 차갑던 새벽의 공기가 빨려들어오자 밤새도록 보일러 온기로 가득찼던 폐속까지 정신이 드는 듯 했다. 한번의 유산 뒤 3년을 넘게 고생해서 와준 아이. 그 아이를 만나는 그날은 이상하리 만치 모든게 행복했다. 마치 다시는 가져보지 못할 느낌처럼.
임신 중기를 넘어서며 보통의 아기들에 비해 큰 머리크기로 인해 출산방법을 고민하던 의사는 결국 수술을 결정했다. 아니 나와 의논을 했었나?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때의 나는 유난떠는 산모가 되지 않겠다는 고집이 있었다. 그런 쿨해보이고 싶은 마음마저 고집이고 아집이었다는 건 늘 겪어봐야 깨닫는다. 아무튼 자연분만이나 천기저귀 따위를 모성애의 산물인양 떠드는 게 싫어 오히려 수술을 권한 의사의 권유가 아주 합리적이고 세련되게 느껴졌다. 의사가 정해준 날짜는 아이가 원래 나와야 하는 예정일보다 열흘이 빠른 날짜였다. 그 이후가 되면 머리가 더 클 수도 있어 수술로도 애를 먹을거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열흘정도 빠르게 나오는 건 별 문제 없다며 본인이 브이백 전문이라고 큰소리치는 저분은 진정한 전문가아닌가. 처음으로 겪는 출산과정에 전문가의 의견을 고분고분 따르는 것이 바르고 슬기로운 산모의 길이라 여기며 얌전히 수술날짜만 기다렸다.
드디러 제왕절개라는 수술을 하러 가는 날, 그런날 조차도 그다지 꽃길이란 걸 걸어본 적 없는 우리 부부는 늘 과하게 씩씩했다.
"무슨 애 낳는데 줄줄이 가. 이따 저녁에나 와서 봐"
쉬는 날도 없이 백반집을 운영하시는 친정 엄마가 가게를 비우고 와서 있어 봤자 같이 마음만 분주해 질 것 같아 신랑과 둘이만 가겠다고 선포를 했다. 막내딸이었지만 나이차이 많이 나는 오빠 앞에서나 어리광을 부렸지 위경련이 와서 응급실에 갈때도 택시를 타고 혼자 가던 나였다. 나중에서야 그 고집도 쓸데없는 객기였음을 알고 후회했지만 이미 지난일이다. 그 일로 이제 큰 일을 치룰땐 꼭 보호자를 두명이상 둔다는 교훈을 얻었으니 값지진 경험이었다고 해야하나? 교훈같은소리...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아무튼 병원에 도착해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수술을 위한 절차를 마친 뒤 신랑과 브이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었다. 부모란 이름의 책임감에 대한 무게를 알았더라면 그렇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까. 아이의 탄생에 대한 어떤 거룩한 기쁨보다 이제 들고 다니기 힘들던 배가 꺼지고 잔뜩 준비해 놓은 아기 용품을 개시할 때가 왔으며 신랑은 초음파 사진이나 들여다 보는 걸 끝내고 실물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단순하고 순수한 기쁨이 가득했던 시간이었다. 그 즐거웠던 시간이 지나고 수술실로 들어갈 시간이 되었다. 15분 정도면 아기가 나온다는 간호사의 설명에 나는 웃으며 '갔다올께' 라는 깃털같은 인사를 신랑에게 남긴채 침대를 타고 들어갔다. 그리고 30분 뒤 나의 아기와 신랑은 구급차를 타고 대형병원으로 가고 있었고 나는 의식을 차리지 못한 채 회복실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그후 48시간 정도의 기억은 아주 희미하거나 강렬한 한조각정도이다. 친정엄마나 신랑을 통해 들은 이야기와 내 기억이 섞여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나의 희미한 기억 속 잠깐씩 의식이 돌아왔을 때 친정엄마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 손을 주무르고 있었고 신랑은 보이지 않았다. 의식이 돌아올때마다 계속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하는 데 그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애기는?"
"애기는?"
.
.
"애기는?"
아기를 낳으러 들어갔었다는 것을 기억한 걸 보면 아주 정신줄을 놓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묻기만 하고 대답을 듣기 전 또 눈을 감았다고 해서 지켜보던 엄마는 함께 기절할 뻔 하셨다고 했다.
내가 의식이 오락가락 했던 건 하혈을 했기 때문이었다. 제왕절개를 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하혈을 계속 했고 피는 멈추지 않았다. 그 하혈도 신랑이 구급차를 타고 가며 전화를 해 급하게 부른 친정엄마가 병원에 와서야 발견했다고 한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몸을 떨길래 이불을 들쳐보니 피가 흥건했다고. 전문가라던 사람들은 엄마가 소리를 지르자 와서 피를 보고선 엄마보다 더 놀랬다고 했다. 안 멈추는 피를 멈추게 하겠다고 서슬퍼런 스텐 집게로 집었다 떼었다를 반복하며 나의 정신줄을 끊었다 붙였다 하던 전문가들은 포괄수가제를 포기하고 이틀만에 혈소판 주사를 6팩 놔주었다. 그제서야 하혈이 멈추고 정신이 또렸해진 나는 신랑을 보고 물었다.
"애기는?"
거짓말을 잘 못하는 신랑은 금세 눈가가 촉촉해졌다.
"숨을 못 쉬어서 중환자실로 옮겼는데 지금은 괜찮아."
"왜 안데려와?"
"괜찮긴 한데 조금 더 본데. 신경쓰지말고 일단 너 몸부터 추스려."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치곤 너무나 슬픔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마음에 불편한 일이 있으면 곧장 곡기를 끊는 사람. 이틀만에 또렸히 보니 아주 바싹 말랐다. 나중에서야 들은 이야기지만 중환자실에 지호를 놔두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기껏 돌아온 병원에서 정신이 희미한 나를 보고는 사랑하는 사람 둘을 한꺼번에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밤을 보냈다고 한다. 그날의 그 두려움은 우리가 둘째를 가지지 않는 이유가 되었다.
내가 정신이 들었다는 소리에 일을 마치고 병원에 들른 오빠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애기 발은 괜찮을거야 걱정하지 말어. 손도 치료받음 될 거 같아."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신랑이 난감해한다.
"무슨 소리야?"
"아니 그게 아니라. 괜찮은데 손이랑 발이 다른건 아니고 좀 접혀있어서..근데 괜찮을거야"
둘러대는 소리만 해대는 가족들에게 저녁 면회를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기어코 저녁 8시 면회를 가게 되었다. 발이 어찌나 부었던지 신발이 아무것도 맞지 않아 신랑의 등산화를 신고 두꺼운 기모레깅스에 임부용환자복과 오리털 점퍼를 입은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차에 올랐다. 불과 3일 전 아기를 만나러 가는 그 길과 너무나도 다른 이 기분. 자칫 라디오에서 슬픈 음악이라도 흘러 나왔다면 왈칵 울음이 터질 판이었다. 자동차 엔진소리조차 버겁게 들리는 자동차는 두려움과 설레임과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침묵속에 30분을 달렸다.
멀고도 가까운 30분 거리의 대형병원 NICU(신생아집중치료실). 앞에 가니 대기하는 부부들이 꽤나 많았다. 가만히 앉아 그들을 보니 모두 다른 얼굴이다. 여유있는 미소를 머금은 사람, 분주함에 상기된 사람, 투덜거리는 사람, 나처럼 정신이 없어보이는 사람.. 시간이 다가올 수록 긴장되는 마음에 두터운 이중문의 조그만 창문으로 아기를 찾아보려 했지만 보일리 없었다. 앉아있기도 서 있기도 힘든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간호사 선생님이 나와 면회시작을 알렸다. 함께 기다리던 사람들은 능숙하게 손소독을 하고 마스크를 쓰고 들어갔다. 모든 것이 아직 낯선 우리 부부와 다른 한부부만 누가 봐도 처음 온 듯이 어색한 모습으로 쫄래쫄래 발걸음을 옮겼다. NICU의 가장 안쪽 구역에 우리 아기가 있었다.
3일만에 아기를 만나는 순간. 그 찬란했어야 하는 순간에, 나는 알콜 소독약 냄새와 각종 기계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의 이름표를 단 아기바구니 안의 내아기는 앙상하고 긴 몸에 우유줄을 입에 꽂고 양손과 발에는 보호대를 차고 있었으며 한눈에 보기에도 큰 머리의 한 쪽은 옥수수콘처럼 혹이 나 있었다. 정신을 부여잡고 떨리는 손과 목소리로 인사를 해보지만 아기는 손발을 떨며 울어댔다. 울음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나타난 간호사가 빠른 손놀림으로 기저귀를 갈아주곤 아기를 안아보겠냐며 품에 안겨주었다. 낯설고 이상한 모양새의 아기가 내품으로 안겨와 울음을 멈췄다. 힘없이 잡은 주먹사이로 내 손가락 하나를 넣어 용기낸 인사를 건냈다.
"지호야 안녕! 엄마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