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것들에 대한 그리움

#2. 정원사와 나무

by 폼폼

거실 한 켠 커다란 유리창으로 넘어오는 빛 고운 분홍, 초록색 여백은 우리 집 늦은 봄 마당의 매력이었다. 마당을 곱씹다 보면 우리 할아버지도 자연스레 함께 떠오른다. 내 유년의 온갖 분홍, 초록을 지켜 주셨던 분.



우리 집 마당엔 유독 꽃과 나무들이 많다. 해바라기, 장미, 벚꽃나무, 철쭉, 진달래 이것 말고 이름 모를 풀꽃들까지. 놀랍게도 전부 다 한 분이 일궈낸 작품이다. 우리 가족은 따로 식물원에 가지 않아도 항상 예쁘고 푸르른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벚꽃놀이, 장미축제 같은 것들 역시 가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축제장에 있는 닭꼬치가 먹고 싶었던 적은 많았지만. 우리 집 마당은 그 정도로 예뻤다.



할아버지는 수시로 마당을 정돈하셨다. 내가 학교에 다녀왔을 때도, 학원에 다녀왔을 때도 언제나. 덕분에 항상 싱그러웠다 걔네는.


담장 너머에 키 큰 나무들은 참 많은 걸
안아줬다.


아침에는 신문을 가지러 부스스하게 현관문을 나서는 내 모습을 감춰 줬었고, 밤에는 시끄럽게 달리는 자동차 소리를 감춰 줬었다. 또 가끔 온 가족이 마당에서 바비큐 파티를 할 때 나는 웃음소리나 고기 냄새를 가려주기도 했고, 겨울에 세게 부는 찬바람을 막아서기도 했다. 내가, 우리 가족이 온전한 안락함을 느낄 수 있도록 감싸안는 요람 같았다. 그래서 유독 내가 고향집에 내려가야지만 진정 휴식을 취했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담장 안의 잔디밭은 나와 참 많은 걸
함께했다.

내 첫걸음마의 순간에도, 현관으로 향하는 길을 두고 잔디를 몽땅 다 밟아 할아버지께 혼나던 순간에도 함께였다. 배드민턴 연습한대 놓고 한 번을 못 넘겨서 공만 수백 번 주우러 다녔을 때도 함께, 이단 줄넘기를 해 보이고 말겠다면서 온 몸에 빨간 줄만 잔뜩 그어졌을 때도 함께였다. 독한 매니큐어 대신 봉숭아를 바를 때 역시도. 잔디밭은 나의 모든 성장을 담은 사진첩 같은 존재다.


나에게 요람과 사진첩을 선물하신 정원사는 나무 그 자체였다.

나무처럼 겉은 울퉁불퉁한데 속은 누구보다

보드랍던

유독 귤을 좋아하던 나에게 많이 먹으면 살찐다며 타박만 한가득 하시곤 장에 가면 꼭 귤 한 박스를 사서 들어오시던 분


나무처럼 한결같던

언제나 당신 몸보다는 가족을, 마당을 가꾸시고 저녁이면 맥주 한 잔을 꼭 드셨던 분


나무처럼 커다랗던

나에게는 언제나 든든하고 큰 그늘 같던 분



할아버지, 보고 싶을 때마다 마당을 한 바퀴씩 걸어요. 어렸을 때 이건 장미고, 이건 해바라기라며 꽃 이름을 하나씩 알려 주시던 모습이 생각나서요. 마당이 없어지는 게 유독 더 마음에 걸려요. 이제 할아버지를 보려면 어디를 걸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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