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통과한 사람에게는 독기가 남는다

상처가 아문 자리에 남는 것, 어둠의 독기에 대해서

by 김글리

고통은 사라졌으나 고통의 세계관은 남았다


고통에는 양면성이 있다.

한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에 대한 환상을 깨뜨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날것의 현실을 보게 만든다. 그래서 어떤 고통은 상처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통찰과 배움까지 함께 남긴다.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은 지 2년 반이 지났다.

지금은 분노도, 억울함도 거의 없다. 갑자기 심장이 조여 오는 일도 사라졌다.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내면은 다시 잔잔해졌지만, 마음은 전혀 밝아지지 않았다. 이상했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해변에 폐기물과 오물이 밀려와 악취를 풍기듯, 내 내면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다.

고통은 사라졌지만, 그 고통이 만들어낸 '세계관'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이것을 ‘어둠의 독기’라고 부른다.




냉소라는 방어막


나는 본래 낙천적이고 사람을 좋아하고 잘 믿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사기로 큰 상실을 경험하며 세상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거둬들였고, 그 자리엔 적대감과 냉소가 남았다.


불행을 통과한 사람들에게는 독기가 있다. 이는 냉소, 피해의식, 적개심 같은 부정적 경향으로 나타난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한 언니는 매사가 부정적이고 냉소적이었다. 가까이 지내보니 꽤 괜찮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는데, 늘 사람들에게 못되게 굴었다. 그녀를 이해하게 된 건 어머니에게 차별받고 자랐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다. 내내 오빠와 비교당하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엄마와 싸우며 버틴 시간들, 나는 그녀가 왜 독해졌는지 이해했다. 또 다른 지인은 유복하게 자라다 고3 때 집안이 망하면서 갑자기 형편이 어려워졌다. 그의 삶은 완전히 망가졌는데 세상은 여전히 잘만 돌아갔다. 그 일 이후 그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며 냉소로 일관했다.


갑자기 그들이 떠오른 건 나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어둠의 독기가 내게 남긴 가장 선명한 흔적은 '냉소'였다.


사기당하고 가장 비참했던 시절, 내 안부가 궁금해 연락해 오는 이는 드물었다. 그러다 얼마 전, 한 선배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1시간 가까이 나를 걱정해 주는 척하던 그의 결론은 결국 자기 딸의 결혼식 초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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