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써니사이드업 전아름 대표_창업하고 8년을 버틴 힘 1
봄을 대표하는 나비는 날아다니는 빛 '날빛'이 변한 말이다. 못생기고 뚱뚱한 애벌레가 아름다운 나비로 변신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놀랍다. 영국의 한 학자가 산책을 하다가, 나비의 탄생과정을 목격하게 되었다. 나비가 고치를 막 뚫고 나오는 중이었는데, 바늘구멍만한 틈으로 빠져나오느라고 오랫동안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학자는 나비를 좀 도와주고 싶어 고치구멍을 넓혀 주었고, 그 틈으로 나비는 수월하게 빠져나왔다. 힘차게 날아오르겠거니 기대했는데, 나비는 무거운 날개를 질질 끌며 기어다니다 곧 죽어버렸다.
왜 나비는 날지도 못하고 죽어버렸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학자의 선의 때문이었다. 나비가 되려면, 고치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힘들지만 그렇게 애쓰는 동안 날개의 힘을 기르고, 몸에 묻어 있는 끈적끈적한 수액을 건조시키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친 나비만이 균형잡힌 날개를 가지고 훨훨 날아오를 수 있다. 봄을 수 놓는 한 마리의 나비는, 그렇게 탄생한다.
8년차 CEO이자, 이제 고작 29살인 전아름 대표를 만나 이야기 나누면서 나는 줄곧 그 나비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창업 포럼이었다. 청년 기업가로서 연사로 초청되었는데, 22살에 창업해 8년째 문화마케팅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 했다. 8년차 사업가는 20대에서는 보기 힘들다. 한국무역협회 2015년 설문에 따르면 많은 청년들이 취업의 어려움’(30.2%)과 ‘자유롭게 일하고 싶어서’(30.2%) 창업에 도전한다. 하지만 2년 이상 버티기 힘든게 현실이다. 그래서 더 돋보이기도 했다. 그 8년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어떻게 지금의 안정적인 사업을 이뤘는지 과정이 굉장히 궁금했다. 게다가 사채를 끌어쓰고 사기 당하는 등 산전수전을 겪었다니, 해 줄 얘기가 많아 보였다. 인터뷰를 요청했고 며칠 뒤, 컬쳐워크 사무실에서 다시 만났다.
# '써니사이드업SunnySideup' 은 2010년에 창업하여 문화콘텐츠를 제작 운영하는 기업이다. 대표서비스인 '컬쳐워크'는 '전국민 문화생활의 습관화'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누구나 쉽게 재밌게 체험할수 있는 문화체험을 제공한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갤러리투어'이고, 이외에도 역사투어, 한옥마을투어, 팝아트초상화, 캘리크라피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된다.
회사홈페이지: http://kulturewalk.kr
회사블로그: http://blog.naver.com/kulturewalk
전 대표가 창업을 한 건 우연이었다. 대학생 때, 친구들과 과제로 낸 사업계획서가 우연히 공모전에서 합격하면서 덜컥 시작하게 되었다. 2010년 창업 후, '써니사이드업' 사업은 일과 수익을 기준으로 3기로 나눠진다.
1기는 2010년부터 2011년, 18개월 간이다. 이때 총 매출이 600만원으로 친구들과 동아리활동 수준으로 사업을 꾸려갔다. 문화마케팅이라는 분야에 초점을 맞춰, 재미는 있지만 주로 돈 안 되는 활동을 했다.
2기는 2012년 3월까지 혼자 1년 동안 일하며 빚을 갚는 데 주력했다.
3기는 주요수익모델인 '갤러리투어'를 오픈한 이후 현재까지다.
다음 인터뷰 글에서는 3기를 중심으로, 1기와 2기 이야기가 적당히 버무려 질 것이다.
써니사이드의 대표 서비스 '컬쳐워크'는 작년 한 해에만 이용객이 1만명이 넘을 정도로 잘 나가는 프로그램이다. 초창기 B2C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기업고객이 70% 이상으로 B2B에서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다. 재구매율도 29% 로 만족도도 높은 편이다. 하지만 아트 클래스를 연다거나, 갤러리 투어 프로그램 등을 제공하는 게 그리 독창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문화체험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곳이 컬쳐워크만이 아닌데, 이렇게 소위 '먹히는' 이유가 궁금했다.
"맞춤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일 거에요. 이런 문화체험 프로그램은 굉장히 많지만, 대개 공방수준으로 운영되어서 규모가 제한적이에요. 하지만 저희는 인프라를 잘 구축해놓아서 5명에서 최대 500명까지도 수용 가능하죠. 프로그램도 전국적으로 진행할 수 있고, 프로그램 수도 많아요."
문화콘텐츠 분야에서 8년 간 한 우물을 파면서 구축해온 네트워크도 써니사이드업의 강점이다. 상근직원은 대표를 포함해 2명뿐이지만,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강사와 가이드가 30명 이상이다. 이들은 모두 프리랜서들인데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전국적으로 분포돼 있기 때문에, 어디에서 어떤 규모로 요청이 들어오든 간에 상관없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날짜도 하루짜리 단기부터 장기까지 가능하다.
"사실 그렇게 독창적일 필요도 없어요. 수요자들의 요구에 잘 맞춰주기만 하면 되니까. 사업하는 분들이 '왜 이렇게 좋은 걸 사람들이 몰라줄까?' 고민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거면 상대도 좋아하게끔 만들어야죠. 그래야 돈이 벌리죠.ㅎㅎ 트렌디한게 중요한게 아니라, 기본적인 게 중요해요."
전 대표의 프로그램이 기업에 먹힐 수 있었던 데는 '세심한 배려'도 있다. 기업에서 프로그램 요청이 들어오면, 전 대표는 고객의 '니즈'을 파악해 프로그램에 녹인다. 예를 들어 팝아트 초상화 프로그램 요청이 들어왔다 치자. 그렇다면 프로그램을 하는 목적을 먼저 파악한다. '직원들의 초심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라는 게 이유라면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림에 자신이 좋아하는 문구까지 새겨놓도록 진행한다. 이런 사소한 것이 프로그램을 좀더 의미있게 만들어주고, 실제 반응도 좋다고 한다. 작년 한해만 300여군데의 기업이 워크숍, 팀빌딩, 신입직원 교육, 회의, 회식등 다양한 목적으로 컬쳐워크를 이용했다. 듣고보니 기업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독창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잘 읽었기 때문이었다.
사업을 하려는 이들이 가장 고민하는 것 중 하나가 아이템이다. 어떤 아이템을 뽑아내고, 또 그 아이템을 어떻게 시장에 내놓을 것인가? 나도 궁금한 부분이었다. 어떻게 하면 누구와도 다른 나만의 '아이템'으로 돈 좀 벌어볼 수 있을까? 아이템엔 관한 한, 전 대표의 생각은 확고하다.
"대부분 특이하고 세상에 없는 아이템을 찾으려고 하는데요, 아이템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안팔리면 바꿔야 하고, 자의로 바꿀 수도 있죠. 세상에 없는 아이템이라는 건 거꾸로 말하면 시장이 없다는 거고, 구매자가 없다는 얘기도 되거든요. 세계최초보다, 기존의 아이템을 좀더 매력있게 가다듬어 내놓는게 더 나은 거 같아요."
애써 창의적인 걸 찾으려 하지 말고, 기존 시장에 나온 걸 좀더 업그레이드이 시켜서 내놓는게 더 좋다는 소리다.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려면 직접 몸으로 뛰는 수 밖에 없다. 내가 생각한 바와 상대가 써보고 느끼는 바는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 대표는 고객들의 피드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써니사이드업과 저는 거의 병적일 만큼 부족한 부분을 많이 찾아요. 기획서가 더 나아졌는지, 고객반응은어땠는지, 표정은 어땠는지 사람들이 피드백을 주면 일단 다 들어요. 저도 인간인지라 물론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피드백도 있죠. 그치만 일단 다 들으려고 노력해요. 그게 결국 회사를 키우는 중요한 양분이니까요."
같은 맥락에서 어느 회사에서는 고객의 짜증을 이렇게도 정의내린다. '고객의 짜증은 우리가 보지 못했던 서비스의 구멍이다'라고. 그렇다고 전 대표가 모든 피드백을 반영하는건 아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것과 받아들여 개선할 것인지를 구분해 반영한다. 실은 이렇게 구분할 줄 아는 것도 노하우라고 보는데, 피드백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전아름 대표가 쓴 책 <스물 일곱,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에 나온 문구가 하나 떠올랐다. 결국 피드백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것도 포용력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안좋은 상황에서 안 좋은 평가를 들었을 때 그것에 얽매인다면
나는 ‘영향을받는사람’이 된다.
반대로 그 평가를 신경쓰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려고 노력하면
나는 ‘영향을주는사람’이 된다.
현재 써니사이드업은 '컬쳐워크'라는 안정된 수익모델을 바탕으로 탄탄하게 운영되고 있는데,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애초 운을 뜨웠던 사기사건과 사채 처럼 그 과정에는 여러 사건들이 있었고, 많은 삽질이 있었다.
"창업하고 6개월만에 공동창업자가 모두 나가고 혼자 꾸려갔어요. 일을 해야하니까 직원들을 뽑았죠. 수익도 없는데, 당시 직원이 5~6명이었어요. 직원들 월급 주느라 지인들 돈과 사채를 끌어다 썼어요. 사채이자로 허리가 휠 지경인데도, ‘사내문화’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또 어디서 주워 듣고 해외여행도 갔죠. ㅎㅎ"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 하지만, 당시 상황은 심각했다. 빚은 순식간에 1억 5천만원까지 불어났고, 이자만 한달에 500만원 이상이 되었다. 사채업자의 독촉 전화가 잦아졌고, 이자를 제때 안 갚으면 집을 찾아오겠다는 협박에 혼자 엉엉 울기도 했다. 속사정은 이러했지만, 당시 그녀는 대외적으로 잘 나갔다. ‘젊고’ ‘여자’에, 남들과 조금 다른 ‘문화벤처기업’을 운영한다는 점이 좋은이야기감이 되었던 까닭에, 많은 언론이 인터뷰를 요청했다. 인터뷰에 응하고 방송에 출연하는 사이 전 대표는 자신도 모르게 ‘성공한 젊은 CEO’로 포장돼어 갔다.
"유명세를 탈수록 한 없이 무기력해졌어요. 사업을 한다고 했지만, 돈 되는 일을 한 적도 없었어요. 돈도 없는데 젊은 사업가라며 유명인과 대표들을 만나악수하고 다녔어요. '대표놀이'하느라 바빴던거죠. "
사람들은 성공했다며 축하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그를 도와줄 사람도, 해결책도 없었다. 너무 무섭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에 결국 유럽으로 도망가듯 여행을 떠난다. 전 대표는 한 달간 유럽을 다니며, 유럽인들이 어떻게 문화를 향유하는지, 박물관과 갤러리는 어떤지 유럽의 문화를 온몸으로 체험했다. 잠깐이었지만 숨통을 틀 수 있던 시간이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왜 말도 없이 외국갔냐, 정말 재미없게만들어주까” 사채업자의 협박전화는 더 거칠어졌고, 빚은 더 늘어났다. 벼랑 끝자락이었다. 나는 전대표가 그때 왜 포기하지 않았는지, 어떤 깡이 있어서 버텼는지 궁금했다.
"어떤 내공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선택권이 없었어요. 당장 취업을 한다해도 갚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파산신청을 할 수도 없었죠. 그냥 가야지, 다른 방법이 없었죠. 그리고 이상하게 주위에서 그만두라는 말을 아무도 안했어요. 그만두고 다른거 해봤자 어차피 0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조언만 하더라고요. 서운했죠. 도와줄것도 아니면서, 그만두지 말라고 하니까. 그런데 그때 알았어요. 아무도 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고, 어느 누구도 날 책임져주지 않는구나... 그럼 내가 해야죠. 살아남으려면."
처음으로 전 대표는 자신이 처한 현실이 무엇인지를 직시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죽을 수 없었다. 겨우 24살이었으니까. 월급을 줄 수 없었기에 직원들도 다 정리했다. 그리고 당장 혼자서 수익을 낼 수 있는 ‘일 다운 일’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서 말하지만, 전 대표는 별명이 ‘닥공’이다. 닥치고 공격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란다. 말 그대로 일단 들이대고, 일단 하고 본다. 이건그의 기질이자, 최고 무기였다. 그때부터 전 대표는 닥공 기질을 발휘해, 옆구리에 포트폴리오를 끼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절박하게 영업을 하고 다녔다.
'성공한 젊은 사업가'라더니 어찌 된거야 주위에서 수군거렸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하루 서너시간씩만 자면서 맡겨주는 일은 모두 처리했다. 1년간 발에 불나도록 일했고, 혼자서 약 1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빚을 갚아가면서 처음으로 가능성을 확인한 시기였다. 그리고 도망치듯 떠났던 유럽여행도 그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었다.
(이야기는 2편에서 계속됩니다. <8년차 CEO가 전하는 노하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