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프가 문득 찾아올 때, 기억하라
1년 넘게 여행하다 보면, 어느 곳도 가고 싶지 않을 때가 온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누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뭘봐도 시큰둥하고, 뭘 봐도 다 지겹다. 몸 안의 에너지가 모조리 빠져나가고, 가뭄에 바싹 마른 논바닥마냥 뚝뚝 갈라진 황폐한 들판이 들어선다. 에너지도, 감정도, 욕망도 모두 말라버린 그 지점. 그 지점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다. 그야말로 한밤 중이다.
얼마 전부터 몸이 너무 좋지가 않다. 길거리에서 닭꼬치를 사먹은게 화근이었다. 에콰도르에 도착하고 출출하던 차, 숙소 앞 어느 식당에서 닭꼬치를 구워 팔길래 하나 사먹었더랬다. 그날밤부터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더니 며칠 동안 아주 심한 설사에 시달렸다. 그게 나을만 하자 이번엔 심한 몸살이 왔다. 기침과 가래가 심하게 끓고, 콧물도 줄줄 흘렀다. 무엇보다 오한이 나 견딜 수 없이 추웠다. 밖에 온도가 30~40도를 오르내리는 데도 나는 이불 몇겹을 둘둘 감싸고 침대에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몸이, 너무 아팠다. 밖에서 다른 여행자들이 떠들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외로움에 더 아팠다.
며칠 동안 두통, 설사, 복통, 오한이 패키지로 찾아와 떨어지질 않자, '이대로 있다간 죽겠구나' 덜컥, 겁이 났다. 인터넷에 내 증상을 찾아보니 신종플루와 흡사했다. 왠만해선 병원 근처도 안가는 나지만, 살고 싶었다. 호스텔 직원의 도움으로 키토에 있는 어느 국제 병원을 찾아갔다. 응급실에서 영어 아는 사람 찾아내, 내증상을 말하자, 그는 일단 링겔부터 꽂아주었다. 그 사이 코에 기체를 마스크끼고 흡입하는 걸 두번이나 했고, 엑스레이도 폐와 얼굴에 두번 찍었다. 이러느라 거의 여섯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의사가 진단 내렸다.
"안면뼈가 박테리아 감염됐어요. 약 4 주쯤 전에 감염됐을텐데, 그동안 면역체계가 약해져 잠복기간을 거쳐 발병했을 겁니다. 약 잘 챙겨먹고, 푹 쉬고나면 나을거에요."
한낮에 들어가서 한 밤에 병원을 나선 내 손엔 항균제가 가득한 약봉지와 20만원이 훌쩍 넘긴 병원 청구서가 남았다.
다음 날, 치료받고 좀 기운이나 간만에 시내로 나갔다. 이전 여행지에서 알게된 호주 청년을 우연히 다시 만났다. 앤소니였다. 키크고, 스타일 있고, 말을 참 사려깊게 하는 친구다. "어머, 왠일이니!" 반갑게 인사하고, 근처 카페에 들어가 2시간 정도 얘기를 나눴다. 내가 열나고 몸살기 있고, 잘 못먹고, 며칠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못했다고 하자, 자기도 그랬고 다른 여행자도 그런 경우를 몇번 보았다고 했다. 그는 나의 증상이 ‘비루 viru’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바이러스감염이란 뜻이다. 하루나 며칠 정도 죽은 듯 아프고 나면 지나갈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죽니마니 하며 서럽게 눈물흘리던 지난밤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피식거렸다. '내가 과민반응했구나.' 마치 생리전에 유난히 우울해지고, 식탐을 겪고, 몸이 차가워지는 증상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다 그게 ‘생리증후군’이며 많은 이들이 겪는 일반적인 증상이란 걸 알게 되자, 마음이 편해진 것과 같았다. 그처럼 지금 증상이 많은 이들이 겪고 지나가는 바이러스 증세일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추측에 불과해도)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페루에서 한 달간 극심한 슬럼프에 빠져 고생하던 생각이 났다. 어느 날, 한밤중에 잠에서 깼는데, 마치 이 지구에서 홀로 깨어 있는 거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자꾸만 눈물이 났고, 마음은 끝을 모르고 아래로 아래로 저 깊은 어둠으로 가라앉았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터널을 홀로 하염없이 걷는 기분이었다.
그때 참 모든 게 지겨웠었다. 남미는 엄청난 크기의 땅덩어리라 이동하려면 보통 20시간씩 걸린다. 그래서 버스 특히 야간버스 엄청 탔는데 그게 체력 소모가 극심했다. 게다가 조금만 방심해도 사기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같은 여행자에게 꽤 많은 돈을 사기를 당하고나서 한동안 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 내가 존경하던 분이 별세 하셔서 기력도 많이 소모된 상태였다. 제대로 못자고, 제대로 못쉬면서 끊임없이 이동하느라 몸과 마음 모두 지쳐 있었다. 그렇게 나는 '슬럼프'라는 녀석을 만났었다.
슬럼프. 사전에 보면 그건 '뭔가가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말이다. 꽤 정확한 진단이다. 권태와 무기력함 피곤함에 짓눌린 마음이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나를 내리누르던 권태가 씻은 듯 사라졌다. 슬럼프는 올때와 마찬가지로 문득, 사라져 버렸다. 터널은 어느 새 끝이 나고, 나는 다시 햇살 가득한 들판에 서 있었다. 대체 어떻게 거길 빠져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빠져나왔고, 희한하게도 세상도 그 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슬럼프가 지나간 자리는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내 안의 뭔가가 그와 함께 쓸려갔다.
그 뒤로 또 한번의 슬럼프를 맞았고, 또 보냈다. 외로움과 아픔을 동반한 슬럼프를 몇 번 넘고나니, 처음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그를 어떻게 넘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넘어서면 분명 이전과 다른 세상이 있을 거라는 걸, 알게됐다.
걷다보면 막다른 길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럼 고개를 넘든, 벼랑을 기어오르든, 멀리 돌아가든 어떻게든 지나가야 하는데, 지나기만 하면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길이 나왔다. 그런 생각하면 지금 아픈 것도, 외로운 것도, 괴로운 것도 나쁘지 않다. 잠시 마음이 춥고, 구름이 잔뜩 껴 있지만, 결국… 해는 다시 떠오를 테니까.
누구에게나, 혼자, 견뎌내야 하는 시간들이 있다. 그걸 슬럼프든 우울이든 뭐라 부르든,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지독하게 깜깜하고 악마처럼 시커먼 암흑의 시간이라는 거. 그러나 한밤 중에도 태양은 있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이다. 우린 그 태양을 'Midnight Sun-한밤중의 태양' 이라 부른다. 가장 어두운 시간, 내 옆을 지켜줄 나만의 태양이다. 미드나잇선.
그 태양을, 지금 당신에게 보내고 싶다.
"뭘 선택하든 자책하지 말아요.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하니까."
-영화 <Wild> 대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