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찔하게, 번지점프
며칠 전 후배를 만났다. 후배는 진로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관심있는 분야가 있는데, 그곳을 가야할까 가지말아야 할까 모르겠어요. " 석달전이나, 두달전이나, 그제나.... 그는 똑같은 고민을 계속 하고 있었다. 고민만 하느라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주저했다. 그의 심정이 이해가면서도 안타까웠다. "움직여야 뭐라도 알게 되지. 당장 할 수 있는 걸 찾아서, 일단 한번 해봐." 그에게 말하며 뉴질랜드에서 번지점프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몹시 주저하던 나를 움직였던, 번지점프 교관의 말도 생각났다.
2004년, 뉴질랜드를 3주간 여행했던 적이 있다.
왠지 뉴질랜드하면, 재밌는 일, 예측할 수 없는 모험이가득할 것 같았다. 뉴질랜드에 오면서부터 나는 결심했다. 온갖 것에 나를 내던져 보기로. 그 첫번째가 바로 번지점프였다. 수십미터 하늘에서 끈하나에 의지해 훅~ 떨어지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모든 걸 체념해버리는 느낌일까, 정말 목숨을 버리는 느낌일까, 아니면 머리꼭대기가 열릴 만큼 짜릿할까.
나는 번지점프를 위해 남부섬에 있는 작은 마을 '퀸스타운'으로 갔다. 이곳은 아드레날린의 수도란 별칭답게 스카이 다이빙, 스노보딩, 제트보트, 갖가지 번지점프 등 앗싸리한 꺼리들이 넘쳐났다. 번지점프가 최초로 시도된 곳답게, 번지점프를 판매하는 숍이 마치 까페처럼 한집 걸러 있었다. 종류도 다양했다. 절벽에서도 뛰어내리고, 다리에서도 뛰고, 하늘에서도 뛰고, 산에서도 뛰어내리고. 호~ 과연 '번지점프의 천국'이라 할 만했다.
나는 그 중 한군데를 택해 과감히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높은 곳에 대해 겁이 많아 남들 다 올라가는 바위한번도 못 올라갔다는 것 따윈 잠시 잊기로 했다.
"젤 높은 번지 얼만가요?? 사진까지 포함 해서요~"
"250달러."
허걱. 생각보다 더 비쌌다. 250달러면 대체 내가 며칠이나 쓸 수 있는 돈이냐? 잠시 고민했다. 그래도 번지점프 땜에 왔는데 비싸다고 돌아서면, 후회하지 않을까? 100% 후회한다. 무덤가서도 후회한다. 그럼 하자! 결정하고선 당당히 번지점프 1회권을 구매했다. 돌아서서 나오는데, 바로 옆 가게 문짝에 붙은 공고를 보았다.
<번지콤보프로그램>
번지점프 3종세트가 단돈 300$
뭐? 번지 점프 한번 뛰는 데 250달런데, 번지점프 3개를 묶어서 300달러에 판다고? 요런 말도 안되는 경우가! 나는 당장 되돌아가서 취소하고 이 번지콤보세트로 바꿨다. 마치 마트에서 하나 사면 천원, 세개 사면 이천원인 묶음빵 사듯 결정했다. 그리고 싸게 산 스스로를 기특해했다.
번지점프 3종 세트는구성이 이렇다.
1. 산 위에서 뛰기 - 47미터
2. 협곡 사이에서 뛰기 -134미터
3. 번지점프를 세계최초로 시작했던 다리에서 뛰기 - 43미터
총 224미터를, 3일 동안 뛰게 된다. 당시엔 '드디어 번지를 뛰는구나~' 마냥 신났다. 놀이동산 가면 매번 무서운 것만 골라 타서 내가 잘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대단한 착각이었다는 거.
그날 오후, 첫 번지점프를 뛰었다. 산에서 뛰어내리는 건데, 우리로 치면 남산에 올라가서, 허리에 끈을 질끈 묶고서 서울을 향해 무작정 뛰어내리는 거다. 뛰기 전부터 몸이 사시나무같이 떨려온다. 그래 추워서 그런걸꺼야. 스스로 달래보지만, 흥분된 표정으로 앉아있는 사람들 가운데 내 얼굴만 심하게 굳어보였다. 쓰읍. 드디어 내 차례. 교관이 허리에 줄을 묶어주고 뛰어내리는 법을 설명했다.
“달려가서 조기 조 앞에서 뛰어 내리면 돼. 기분이 어때? 안 무섭지??”
나를 뭘로 보고...하나도 안 무섭다. (고 암시를 걸고 있을 뿐이다.) 후아~한숨 크게 한번 쒸고 달려나갔다.
"으아아아아아~~~~" 소리지르며 뛰어내리려는 찰나, 내 앞으로 이어진 깊은 허공을 보았다. 순간, 몸에 전기가 쫘~악 흐르면서, 절대, 절대로 뛰어내릴 수 없어!!!! 라며 뇌세포가 소리치는 걸 들었다. 내 발은 '저절로' 바닥에 붙어버렸다.
난 염치 불구하고, 교관 팔 붙잡고 애원했다.
“야, 잠깐만 기다려봐..나 시간이 필요해..잠깐, 잠깐이면 돼.”
원숭이처럼 생긴 냉정한 교관 녀석, 날 한번 째려보더니 말했다.
“안돼. 여기 오래 서있을수록 더 힘들어져. 그냥 뛰어내려. 정 안되겠으면 환불해줄게."
환불해준다는 말에 자존심이 확 상했다. 쳇, 내 치사해서 뛴다. 나 뛸 수 있다고. 그래 한번 죽어보자. 옆에서 교관이 다시 카운트 했다.
" 5,4,3,2, 1!"
그 순간 그냥 뛰었다. 기억도 안 난다. 내가 어느 순간 날아버렸는지. 누가 그랬을까. 뛰어내리는 순간 엄청난 행복감이 느껴진다고.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허공에 있었다. 행복은 개뿔, ‘아, 그냥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이 생각 뿐이었다. 끝나고 나서도 심장이 어찌나 벌렁거리던지, 너무 놀라서 비명도 못 지르고 그렇게 첫 번째 번지를 끝냈다.
다음 날은 가장 높다는 '네이비스 번지점프'였다. 가이드는 번지점프 참가자들을 모아 차에 태우더니, 구불구불한 산길로 한 시간 반이나 들어갔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깎아지를 듯한 절벽 앞이었다. 올려다보니, 엄청나게 높은 협곡사이에 곤돌라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거기서 번지점프를 한다고 했다. 허걱, 무려 134미터. 정말 죽는구나. 곤돌라에 올라가는 순간부터, 사시나무 떨듯 몸이 떨렸다. 절벽 어딘가에서 망나니가 칼춤을 추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를 제외하고, 사람들이 너무 명랑했다. 머리 허연 할머니도 있었고,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한 여자도 있었는데 다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나만 떨었다, 이런, 제기동. 나는 무시무시한 높이에 밑도 못 쳐다보고 앞만 보았다. 하이고, 또, 내 차례다.ㅠ 이번에도 교관의 갖은 협박에 못 이겨, 나도 모르게, 순간 (짜증나서) 뛰어버렸다.
뛰어내리며, 젖먹던 힘을 다해 비명을 질렀다.
약 8초간의 추락... 그냥 짜릿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끝없이 떨어질 것만 같았는데, 순간 내 다리를 묶은 줄이 퉁~ 하고 튕겨 올랐다. 휴, 살았네! 그런데 뭐가 잘못됐는지, 남들은 번지 끝나고 우아하게 앉아 올라오는데 나만 허공에 박쥐처럼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올라왔다. 아, 발에 묶인 끈을 못 뗐구나. 뛰는 자세도, 끝내는 자세도 그렇고 나는 교관들이 하지 말라는 행동은 다하고 있다. 누가봐도 번지점프 낙제생이었다. 교관들이 킥킥 대며 나를 계속 쳐다봤다.
"또 해볼래?"
"안해... ㅡ.ㅡ"
마지막 번지점프는 세계 최초로 번지점프 사이트에서 뛰어내리는 것이었다. 매번 그랬지만, 이번엔 정말 사형대에 끌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너무 하기 싫었다. 하지만 날 끝까지 잡은 건 이 죽일놈의 도전정신. 아, 이 넘은 당췌포기란 걸 모른다. 이것도 뇌세포 탓이다. 전날 절벽에서 뛰었더니 43미터 다리가 바닥처럼 낮게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역시 나에겐 그것도 힘들었다.
첫날 만났던 교관을 다시 만났고, 우린 똑같은 과정을 또 반복해야만했다. 이제는 서로가 친근하다. 나는 또 교관 팔 잡고 사정하고, 교관은 또 타이른다.
“이봐 이봐, 여기 서있으면 힘들지만 뛰어내리면 진짜 신난다고~”
“야~누가 모르냐?? 나도 안다고..근데 발이 안 떼져.”
“밑을 보지 말고, 저 앞을 봐~자 다시 센다. 하나 할 때 뛰는 거야~~”
에라~나도 모르게 '또' 뛰어내렸다. 주변에서 나와 교관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내가 점프를 결국 해내자, 박수 치고 환호해주었다. 네네네, 고마워요, 저 이런 사람입니다.
그렇게 3번의 번지를 끝냈다. 누가 미칠 듯 짜릿하다 했나. 나는 그저 죽다 살아났다는 안도감 뿐이었다. 마지막 점프대에서 내려오며, 나는 굳게 다짐했다. 이번 생에서 다시는 번지 점프를 안하리.
지금껏 잘 지키고 있는데, 다만 삶이 나를 번지점프대에 세울 때가 있다. 할까말까 굉징히 망설여지는, 하고 싶지만 너무 두려운 그런 선택의 기로에 설 때...언제나 번지점프가 생각난다. 그러면 원숭이처럼 친근하게 생겼던 그 교관이 떠오르고, 그의 말이 내 귀에 자동재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