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레알 '숫자'에 불과한 존.멋 사람들
보통 사회에서 통용되는 나이는 '객관적 나이'다. 내가 살아온 햇수를 따지는 거다. 하지만 이는 여러 나이 중 하나일 뿐. 나이에도 종류가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3가지를 꼽아보면, 살아온 햇수를 따지는 객관적 나이, 내 몸 상태를 말해주는 생물학적 나이, 자신이 스스로 느끼는 주관적 나이가 있다. 가장 일반적으로 쓰는 건 객관적 나이지만, 학자들은 가장 중요한 건 '주관적 나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객관적 나이에 갇혀 있다.
"아, 너무 늦었어." "이 나이에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벌써 서른인데...." 라며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평균속도에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객관적 나이로 살아가는 이들에겐 '나이'가 숫자가 아니라, 큰 장애물이다. 나도 20대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30대가 넘어가니, 나이라는 걸 자꾸 의식하게 되었다. 아, 내가 지금 이걸 시작할 수 있을까? 괜찮을까??? 라고. 그때마다, 나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이스탄불에서버스타고 5시간을 달리면 동화같은 마을이 나온다. 이름하여 '사프란볼루'. 오스만시대 전통가옥이 그대로 보존된 곳으로 유명하다. 사프란볼루는 사프란이란 꽃에서 이름을 땄다. 사프란은 황금보다 비싼 향료로, 10g에 20만원이 넘는다.
이곳은 과거 실크로드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사실 그때문에 방문했던 곳. 재밌게도 골목골목의 바닥들이 자갈돌로 만들어져있는데, 자갈을 밟으며 거리를 쏘다니는 맛이 쏠쏠하다. 마치 동화속 한 마을을 걷는 느낌이었다. 이곳에서 한 한국 아주머니를 만났다.
여행자 숙소에서 내가 묵은 방엔 중국 20대 여자아이와 50대 한국 아주머니가 먼저 와 있었다. 서로 통성명하고, 그날 저녁을 함께 먹으러 갔다.
아주머니는 딸뻘되는 중국친구에게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했다. 내게도 반말을 하지 않고 높임말을 쓰셨다. 여행을 꽤 많이 한 듯, 얘기하면서 본인여행이야기를 중간중간 해주었다.
"터키는참 여행하기 편한 곳이에요. 버스 시스템도 잘돼 있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여행 기반이 잘 갖춰져 있어요." 라며, 남미며 유럽 이야기를 해주었다.
당시 나는 세계여행 초반기라, 터키도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런데 터키가 쉽다는 말을 듣고 있자니, 대체 여행을 얼마나 많이 하신걸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여쭤봤다.
"얼마나 여행하신거에요?"
"일 년에 두 어달씩 여행해요, 한 나라나, 한 대륙을 여행하죠. 그렇게 여행한게 벌써 7년째네요."
헉, 7년. 7년동안 꾸준히 여행한것도 놀랍지만, 7년 전에 여행을 시작했다는게 더 놀랐다. 정확한 나이는 여쭤보지 않아 모르지만 서른이 넘었다는 딸과 외모로 미뤄볼 때 50대 후반쯤으로 추측되었다. 그럼 50대 초반에 여행을 시작했다는 소리다. 서른이 넘었을 뿐인데도, "이 나이에 무슨"이냐며, "좋은 시절은 다 갔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그런데 하물며 50대야... 아주머니는 자신이 어떻게 여행을 시작하게되었는지 알려주셨다.
"예전에 뉴질랜드에서 60대 할머니를 만났어요. 그런데 그분이 그 연세에, 세계여행을 하고 있더라고요. 굉장히 인상깊었죠. 정말 멋있어 보였어요. 그때 결심했어요. 나도 저렇게 늙어야 겠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도 여행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렇게 여행을 시작해서 남미,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까지 두루두루 돌아디니고 있다. 이제는 여행을 안가면 딸들이 미리 비행기표를 끊어주고 가라고 등떠민다고 한다. 나는 아주머니의 얘기도 멋졌지만, 태도는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아낌없이 나누는 데 선수였다. 누가뭐가 없다, 필요하다 그러면 바로 주었다. 그게 가이드북이든, 볼펜이든, 상관없었다. 본인의 나이도 경험도 내세우지 않았다. 말과 행동에서 자기 생각과 의사 표현은 확실했지만 고집하지 않았다. 3일을 같이 있었는데, 아주머니를 볼 때마다, 저절로 존중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아, 나이는 저렇게 들어야 하는 거구나.'
아주머니를 보며, 호주에서만난 할머니가 떠올랐다.
2003년에호주를 여행할 때, 오토 캠핑장에서 잠시 머물렀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이동에 불편함은 있었지만, 일반 여행자 숙소보다도 훨씬 싼데다, 시설이 좋았다. 보통 여행자 숙소는 99.9% 가 젊은이들인데, 여긴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많았다. 그 중의 최고봉은 나이 70살에 집팔아 캠핑카 사서 호주 한바퀴 돌며 여행하던 할머니였다. 하얀 은발이었던 그 할머니는 직접 운전을 하면서 우리나라 70배나 되는 드넓은 땅을 여행하셨다. 그후로도 멋지게 나이먹은 사람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2004년 태국을여행할 때는, 여행자 숙소에서 영국 할아버지를 만났다. 얼마나 나이를 드셨는지 모르겠지만, 발음도 불분명했고 걸음걸이는 굼벵이처럼 느렸다. 그런데도 젊은이들과 어울려 펍에 가고 밥을 먹고 유쾌하게 떠들었다. 주책이라기 보다, 참, 용기 있으시다! 란 느낌이었다. ㅎ
또 2013 년 쿠바 아바나에서 정말 멋진 한국 노부부를 만나기도 했다. 60대 중반을 훌쩍 넘기셨는데, 두 분이 손잡고 안가본 트레킹 코스가 없었다. 내가 듣도보도 못한 곳을 줄줄이 읊으셨다. 안나푸르나는 기본이고,젊은 친구들도 힘들다는 토레스 델 파이네의 W 트레킹에도 다녀오셨다. 풍채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정말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있는 60대 중반의 할아버지 할머니, 딱 그 풍채였다. 그런데 전혀 힘들다고 하지 않으셨고, 굉장히 즐기셨다. 아, 정말 나이가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구나, 라는 걸 그 분들을 보면서 느끼게 됐다.
아주 잠깐의 만남이었는데도 그 분들이잊혀지지 않았다. 그들은 객관적 나이로 살고 있지 않았다. 주관적 나이로, 자기가 살고싶은 대로 살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건 바로 이들에게 쓰이는 말이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이 나이에..내가 어떻게 해.' 이렇게 한계긋지 말고 살아야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생각만으로는 잘 안됐다. 한 살 두 살 먹어가면서, 어느날 아침, '이 나이에 내가 어떻게하겠어'라고 읊조리는 나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나도 남들처럼 그렇게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그러면서 알게됐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는 건 말로만은 안된다는 거. 하고싶은 걸 끊임없이 찾아가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하고, 남 눈치를보지 않을 '배짱'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내 나이를 내려놓을 수 있는겸허함 혹은 '겸손'이 있어야 했다. 실은 이게 가장 어려운 거 같다. 내 나이를 내려놓는 것. 나이를 내려놓을 줄 아는 이들에게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자신을 허용한다.
나 역시 이 멋진 선지자들에게 지고 싶은 맘 한치도 없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말이 아니라 내 삶으로 살아내길 원한다. 그들을 생각하며(졸라) 외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