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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리 Jun 02. 2021

어느 권태로움을 날린 한 가지 가르침

어제, 갑작스런 권태감이 몰려왔다.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게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걸 깨부시고 싶어졌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 갑자기 화도 났다.  


강의안 준비하는 것도 지겹고 글쓴다고 새벽마다 자판두드리는것도 지겹고 아침산책도 지겹고 저녁 조깅도 지겨웠다. 모든 게 지겨워졌다. 그래서 하는 둥 마는 둥 시간을 보내다 뭐라도 좀 변화를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할까 하다, 며칠 동안 머리가 신경쓰였던게 생각나 머리를 하기로 했다.  


미용실을 간 건 거의 10년만인것 같다. 염색도 셀프로, 컷도 셀프로 해서 그간 미용실을 가지 않았다. 갑작스레 가려고 하니 갈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들어가본 헤어샵 몇 군데는 모두 예약이 꽉 차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검색으로 홍제역 부근에 괜찮은 미용실이 있다는 걸 발견, 당장 예약했다.


저녁 7시반에 거의 마지막 예약을 하고갔다. 미용실은 홍제역 바로 옆이었는데, 분위기가 괜찮았다. 나는 어떤 장소에 들어가면, 그 장소와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곤 한다. 그곳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느껴보고, 그것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나머지 세부적인 장식과 구조물들을 쭉 둘러본다. 그러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 엿볼수가 있다. 


미용실은 30여평 규모의 작지도 크지도 않은 크기였고, 늦은 저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텝들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녁 7시 넘었는데도, 이정도의 활기를 유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스텝간의 팀웍도 좋아보였고, 자기개발에 꽤 열심이라는 표식이 곳곳에 깔려 있었다. "이번달 100시간 완료!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라는 메시지를 적은 스텝들의 고백이 벽에 걸려 있었고, 잡지만이 아니라 읽을만한 자기개발서도 십여권 꽂혀있었다. 미용실의 컨셉도 분명했다. 도심에서의 일상에서 나를 위한 쉼터.  수시로 미팅하고 교육을 하고있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미용실이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느껴져, 흥미로웠다. 


내 머리를 맡아준 사람은 이 곳의 부원장으로 40대 중반쯤 되는 활기찬 남자분이었다. 그가 이 미용실의 활기를 유지하는 중요한 축이라는 건,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큰 목소리로 그러나 위화감없이 스텝들에게 이야기를 했고, 또 큰 소리로 웃었다. 제스쳐도 컸다. 부원장은 가운뎃 머리를 길게 길러 상투틀듯 묶어올렸고,  양옆 머리는 스포츠로 밀어버렸다. 평범한 40대 남자의 헤어스타일은 아니었다. 배는 약간 나왔고, 기본적으로 여유와 활력이 있었다. 내가 몇년이나 이 일을 하셨냐고 묻자, 20년 넘게 해왔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때부터 부원장은 말문이라도 트인 듯, 쉬지도 않고 본인의 20년 헤어역사를 들려주었다. 


자기가 어떻게 이 일을 시작했고, 또 중간에 어떤 어려운 일이 있었는지... 얼마나 이야기에 열중했던지, 때때로 머리 자르다 말고 두 손으로 감정까지 표현해가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내심 이 분이 이야기하시느라 내 머리 자르는 걸 잊고 있는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래도 베테랑은 베테랑이었다. 부원장은 30분 내내 이야기하면서도 내 머리를 잊지 않고, 깔끔하게 잘라놓았다. 기장은 유지하고 층을 좀 내어서 가볍게 하고 싶다는 나의 당부도 잊지 않고 반영했다. 그 대화가 소용이 없진 않았다. 그날 저녁의 권태로움에 대한 답을 얻었으니까. 


내가 "어떻게 20년 넘게 한결같이 같은 일을 이렇게 즐겁게 해올 수 있느냐"고 묻자, 이런 답을 하더라고. 


"나도 힘들어요. 근데 매번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찾으려고 해요. 손님들과 만남에서, 직원이랑 같이 일하는데서 매번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죠. 그래야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래 할 수 있어요. 그냥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면 이렇게 오래 못하죠. 이젠 스텝들도 가족같애요."


매번 즐겁게 할 수 있는 뭔가를 찾아낸단다. 그 말이 크게 와 닿았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그래 이게 내 길이야, 하고 시작해도 권태감을 느낄 수 있다.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힘들 수도 있다. 다시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겨워질 수 있다. 


그런데 부원장은 내게 이런 걸 알려주었다. 


아무리 내가 선택한 일이라도, 그걸 지속하려면 또 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계속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매번 눈을 크게 뜨고 의미와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일은 결코 저혼자 성장하지 않는다. 그를 하는 나도 함께 성장해야 한다. 같이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일에서 권태로움을 느낀다면, 이것부터 하면 된다. 


무얼하든, 매번 하나씩 즐거움을 찾고 더해갈 것. 


매우 권태로웠던 저녁, 배나온 미륵부처와 비슷했던 부원장이 좋은 걸 알려주었다. 새삼 세상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 어디서나 스승들이 숨어있다가 필요한 것들을 전해주는 것 같다.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네. I'm grateful for your work and teachings as al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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