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가족이란?
초등학교때 새학기마다 하는 호구조사가 참 싫었다. 매년 봄이 되면 호구조사를 하는데, 다른 건 둘째치고 가족을 써넣는 칸이 늘 부족했다. 서 너 칸은 더 그려 넣어야 온 가족을 적어넣을 수 있었다. 그게 번거롭기도 했지만 조금 창피하기도 했다. '와, 너네는 왜 이렇게 식구가 많냐'는 친구들의 놀라움을 접할 때면 더 그랬다. 당시는 둘도 많으니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시대였다.
그런데 우리 가족 수는 총 8명.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를 비롯해 무려 5남매가 있었다. 큰언니, 오빠, 작은언니, 꼬마언니, 그리고 내가 오남매의 구성원이었다. 내가 태어난 1983년은 한 자녀 정책에 힘입어 출산율이 처음으로 2.1명 이하로 떨어진 해였다.
인구정책은 꽤 성공적이어서, 친구들만 봐도 남매가 가장 많았고 더러 삼남매도 있었지만 외동도 꽤 있었다. 그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독수리도 아닌데 오남매라니... 덕분에 지방공무원이던 아버지는 아이를 많이 낳아서 눈치를 많이 봐야했다.
그건 그거고.
어릴 때를 떠올리면 늘 사람들로 복작대던 유쾌한 기억이 많다. 집안에 사람이 많다 보니 뭘 해도 재밌었다. 윷놀이를 해도 재밌었고, 화투를 쳐도 재밌었다. 눈싸움을 해도 재밌었고, 그냥 싸워도 재밌었다. 사람이 많으면 편이 갈리기 때문에 서로 눈치작전이 치열했다. 또 누군가 재밌는 이야기를 하면 나머지 7명이 와아~하고 웃음을 터뜨리니 그것도 재밌었다. 엄마는 반찬을 한번 하면 솥으로 했는데, 뭘 만들어도 그날로 순삭되었다. 라면 1박스도 이틀이 가질 못했다.
8명이 모두 성격도 기질도 취향도 달랐는데, 덕분에 작은 사회를 경험하며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단이 있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도 있었고 귀가 얇아서 누가 무슨 말만 하면 홀라당 넘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노는 걸 좋아하는 한량기질을 가진 사람도 있고, 자기가 맡은 일은 성실하게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사람도 있었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도 있고, 이야기를 찰지게 잘 하는 사람도 있었다. 갈등을 봉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갈등을 일으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이런 다양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자라며, 본능적으로 그들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법을 익혔다. 그래야 살아남으니까. 그러다보니 나중에 누굴 만나도 ‘저 사람은 이런 종류의 사람이구나’ 라고 빠르게 성향이 파악되었고,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아 저 사람은 우리 둘째 언니랑 비슷하네.’ 식으로 이해가 되었다. 대가족 덕분에 어딜 가나 잘 살아남을 수 있는 자질을 공짜로 기른 셈이다.
가족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저마다 자기 친구와 지인들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며 가족의 개념은 한층 확대되었다. 오빠의 친구들도 놀러오고, 언니의 친구들도 찾아왔으며, 할머니의 지인들도 사방팔방에서 찾아들어와 며칠씩 묵어가곤 했다. 어린 내 눈엔 모든 사람이 다 신기했다. 전라도, 서울, 제주도, 충청도 등 서로 다른 출신의 사람들이 뒤섞이고, 기독교, 증산교,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종교와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어울렸다. 덕분에 더 넓은 생각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언니오빠들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뿔뿔이 흩어졌고 나 역시 고등학교 이후 집을 나와 살면서 대가족의 기억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내게는 가족이란 개념이 약간 묽다. 피로 맺어진 관계만이 아니라, 함께 지내며 정서적 유대를 나누는 사람들이 가족이란 생각이 든다. 함께 복작거리며 서로를 구성하고 만드는 재료가 되는 사람들.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 '나'라는 인간 안에는 내가 지난 수십년 간 겪어온 가족의 면면이 모두 녹아있다.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내 팔 할을 채우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나는 결국 내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총합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전의 가족은 법적 혼인이나 혈연관계인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함께 거주하고 생계를 공유하거나 정서적 유대를 가진 친밀한 관계이면 가족으로 인식한다. 내게 가족은 함께 사는 사람들이다. 혈육이 아니더라도 함께 살며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면 가족이 될 수 있다. 여러분은 가족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그들은 내게 어떤 존재들인가? 5월은 그를 생각하기에 적절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