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의 시간
저는 지금 우붓에 있습니다. 지난주 금요일에 이동했으니 딱 일주일 만이네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일주일이 어떻게 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중입니다. 아무것도 안 할 계획으로 발리에 온 터라 별다른 계획도 세우지 않았고 와서도 딱히 뭘 할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때마침 허리를 다친 덕분에 더 더욱 뭔가를 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허리가 아프니 요가도 어렵고 서핑도 어렵고, 한시간 이상 걷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참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남들 다하는 거 저도 하려고 기웃거렸을 거고, 또 종일 걷거나 활동하며 몸을 혹사시켰을 거거든요. 저는 활동하는 걸 너무 좋아해서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안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허리를 다쳐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덕분에 원래 계획인 ‘아무것도 안하기’를 아주 충실하게 수행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매우 심심하게 보내는 일상
이곳에서 제 하루 일과는 매우 단순합니다. 주로 걷고, 먹고, 마시고, 쓰고, 자기로 이루어지죠. 하루 4~5번씩 30~40분씩 걷습니다. 여기저기 걸으며 구경하다, 지치면 오토바이를 빌려 우붓 이곳저곳을 쏘다닙니다. 배고프면 식당가서 밥 먹고, 목마르면 카페 들어가 음료수 마시고, 뭔가 떠오르면 글을 쓰고, 잠이 오면 잡니다. 이미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데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하고 싶어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한국에 있을 땐, ‘실용성’과 ‘효율’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이건 지금도 제 핵심가치들입니다) 무엇을 하든 최대한 빠른 시간에 더 많이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반드시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죠.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삶에 유용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무용無用’한 활동과 시간을 매우 싫어했죠.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이곳에서는 매우 비효율적으로 하루를 보내고, 정말 쓸모없이 시간을 보냅니다. 생각보다 그게 싫지가 않습니다. 사실 즐겁습니다.
중요한 건 '열심히'와 '멍때리기'가 균형을 이루는 것
꽤 오랫동안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요. “잘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라고!” 그런데 그게 오히려 제 두려움을 감추는 행위일 뿐이었더라고요. 내가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더더욱 ‘유용한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죠. 그런데 이제는 '무용함'의 가치도 발견하게 됐습니다. '유용함' 이상으로 중요한 건 ‘유용함과 무용함이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 발리는 힌두교를 믿는데요, 힌두교에선 선과 악을 철저하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선과 악이 나름의 역할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균형 잡힌 세상이 된다고 보지요. 선한 신도 악한 일을 저지를 수 있고, 악한 신도 나름 정의로울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 개념이 마음에 듭니다. 모든 건 상대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것 말입니다.
좀 쓸모 없어도 되잖아요. 가끔은 비어 있어야 뭔가를 담을 수도 있고, 새로운 쓸모를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요.
오늘 하루 더 비어있길, 더 가벼워지길 바라며
발리의 바람 한 줌을 오늘 마음편지에 동봉해 보냅니다.
Terima kasih (뜨리마 까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