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의 비밀
여러분은 기억력이 어떤가요? 좋은 편인가요, 아니면 자꾸 떨어지고 있나요? 나이가 들어가면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신경과학자 리사 제노바에 따르면 1년 중 세세하게 기억하는 건 10일 내외, 최근의 기억도 3%도 안 되게 저장될 뿐입니다. 인생 대부분을 잊고 산다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특별한 기억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하는지 배우고 싶어집니다. 한번은 영국 드라마 <셜록 홈즈> 에서 엄청난 기억력을 자랑하는 등장인물을 보게 됐습니다. 그는 시즌 3편에 등장한 언론 재벌 '매그너슨'인데요, 세계 주요 인물들의 신상정보를 파악해 그걸 무기삼아 협박하며 세력을 키워갑니다.
다들 그가 어딘가에 비밀이 담긴 문서 창고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를 찾아내 파괴하려고 작전을 짭니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그 비밀창고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그의 머릿속이었다죠. 즉, 모든 정보를 외부가 아니라 ‘기억’해두었던 겁니다. 수백, 수천명의 신상정보를 다 기억한다니, 엄청난 기억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드라마니 그럴 수 있겠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가 활용했던 기억법이 실제 존재하더군요.
혹 ‘기억의 궁전 (Mind palace)’이라는 걸 들어보신적 있으신가요? 이게 바로 그 언론재벌이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기억의 궁전은 16세기 예수회에서 유행했던 기억술의 하나로, 고대 로마때부터 사용했다죠. 어떻게 하는 걸까? 구체적 방법은 이렇습니다.
1) ‘특정 구조물’을 구상합니다. 도서관, 궁전, 서재 등 특정 공간을 상상하는데 자세할수록 좋습니다.
2) 움직일 동선을 만듭니다. 어디에 뭘 넣을지 걸 동선에 따라 기억할 것들을 배치하는 거죠. 로비, 1층 복도, 계단, 2층 서재 등 위치에 따라 넣을 것을 정해둡니다.
3) 저장했으면 기억의 궁전을 상상으로 거닐어보면서 그 위치를 기억해둡니다.
이 과정을 마치면 정보가 있는 위치만 기억하면 됩니다. 그 위치에 다다르면, 연관된 개념이나 정보가 떠오르게 될 테니까요. 이후에는 기억이 필요하면 언제든 내가 만들어둔 구조물로 들어가면 됩니다. 이게 처음에는 와닿지 않았는데, 기억의 특징을 이해하니 가능하겠더군요.
'기억'이란 건 어떤 정보를 부호화해서 뇌 속에 저장하고 그를 꺼내는 일련의 과정입니다. 즉 책에 라벨을 붙여서 도서관 특정 서가에 꽂아두고 필요할 때 그를 꺼내는 것과 같은 프로세스입니다. 기억의 궁전은 그 과정 자체를 이미지화해서 적극적으로 기억을 저장하는 방식인거죠. 그래서 장소법이라고도 합니다.
셜록 홈즈에 나왔던 언론 재벌의 기억 방식이 정확히 ‘기억의 궁전’과 같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머리 속에 거대한 도서관을 하나 짓고 정보를 수집할 때마다 하나 하나 라벨을 붙여 각 장소에 보관해둡니다. 기억이 필요할 때면 조용한 공간에서 눈을 감고 그 도서관을 상상으로 찾아갑니다. 그리고 특정 정보가 보관돼 있는 서가로 걸어가 본인이 저장해둔 기억을 자유자재로 불러왔죠. 이게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몇 번을 돌려보면서 그 장면을 기억해두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비슷한 방식을 사용해 기억을 하더군요. 그는 글감을 모을 때 여느작가처럼 메모를 하기보다 ‘암기’하는 방식으로 모읍니다. 장편 소설을 쓰기 전에 차곡차곡 글감을 모으는데, 그는 그것들을 노트가 아니라 머릿속에 있는 ‘개인 캐비닛’에 저장해두었습니다. 뭔가 좀 이상한 것들, 미스터리하거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들을 주로 모으는데, 채집하면 간단한 라벨 (날짜, 장소, 상황) 같은 걸 붙여두고 머릿속 캐비닛에 넣어두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머릿속에 저장해두는 걸 더 선호한다고 고백했는데, 만약 잊어버리면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들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잊어버릴 정도면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쿨한 기억법이죠? 저도 영감을 받아 저만의 기억저장소를 하나 지었습니다. 제가 지은 구조물은 일본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성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확장이나 축소도 얼만든지 가능한 대단히 유연한 성입니다. 저장용량에 한계가 없기 때문에 마음껏 활용할 수 있죠. 총 6층 건물로 지었는데 이름은 ‘마이 테베 My Thebe’입니다. 고대 테베에서는 도서관을 ‘영혼의 진료소’라고 불렀다죠. 일종의 제 영혼의 보관소인 셈입니다. 지내면서 좋은 정보나 영감을 받을만한 것을 접하면 그를 카테고리화해 마이테베에 넣어둡니다. ‘이 정보는 3층 아이디어 섹터에 넣어두고, 이건 1층 글쓰기 섹터에 넣어두자’는 식입니다.
우리 뇌는 기계와 같아서 계속 써주지 않으면 그 기능이 점점 쇠퇴됩니다. 하지만 쓸수록 향상되죠.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떨어지는 게 자연스럽지만 당연한 일은 아닙니다. 이런 기억술을 활용해 적극적으로 두뇌를 활용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뇌 기능의 10%도 못쓴다고 하는데, 이참에 나만의 기억저장소를 만들어 뇌가 가진 잠재력을 더 써보시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