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벤에셀 Nov 01. 2020

그저 담장 안을 엿볼 뿐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능동적인 행위가 나의 제목이 된다

                                                                                                                                 

 대학교에서의 6학기 째. 나는 이번학기부터 국어국문학과를 복전하고 있다. 


 주 전공은 경영학과. 국어국문학과 복전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생각하는 힘을 키워서 사회에 나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국어국문학과의 수업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각하게 한다. 매번 내 한계를 마주하게 하고, 부딪치게 하고 그럼에도 해나가고 싶게 한다. 이 새로운 자극이 난 나쁘지 않다. 


 이번학기 떨리는 마음으로 처음 들었던 수업은 ‘고전소설의 이해’였다. 사실 고전소설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그저 이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님에 대한 평판이 너무 좋아서 그 교수님의 수업을 들어보고 싶었다. 교수님은 첫 수업 날 오티에서 ‘문학’에 대해 말씀하셨다. 문학. 문학은 문(文)을 하는 학문. 사람이 남긴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하셨다. 문학이 지금과 같이 예술의 한 장르로 의미가 축소된 것은 근대 이후라고 하셨다. 그 이전에 문학은 사람이 남긴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교수님에게서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졌고 나는 그 자부심이 좋았다. 과거에 소설은 小說이라는 명칭에도 내포되어 있듯이 대단치 않은 이야기, 자질구레한 이야기로 여겨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무용(無用)한 이야기들은 사람을 감화시키는 힘이 있다. 


 이번 학기 나에게도 이런 감화를 준 고전소설이 있었다. 김시습의 <이생규장전>이 그것이다. <이생규장전>은 남녀 간의 기이한 사랑이야기를 다룬 전기소설이다. 


<이생규장전>의 제목은 ‘이생이 담장 안을 엿본 이야기’ 라는 뜻이다. 왜 제목이 이렇게 지어졌을까 궁금했다. <이생규장전>에는 남자주인공인 이생과 여자주인공인 최랑이 등장한다. 이들의 사랑은 이생이 최랑의 집 담장 안을 엿보는 아주 사소한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생이 한 것은 이게 전부이다. 


이생이 ‘능동적으로’ 한 행위는 담장 안을 엿본 것 뿐이다. 그 이후 모든 이야기는 최랑의 주도로 이어지고 최랑은 이생의 지음(知音)이 되어준다. 최랑은 이생을 그가 알아봐주길 원하는 방식으로 알아봐주며 사랑, 용기, 재산을 준다. 이생은 최랑 덕에 행복했다.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이 소설을 끝마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최랑을 죽임으로써 이야기를 비극적으로 끝낸다. 


 작가는 왜 이생에게 모든 것을 주었던 최랑을 이생에게서 앗아감으로써 이야기를 마무리했을까. 나는 이 지점이 너무 궁금했다. 교수님은 <이생규장전>을 쓴 작가인 김시습의 삶을 통해 이 소설의 엔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김시습은 6세 때 세종에게 영재라는 소리를 들었던 인재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은거하며 살다 말년에 <금오신화>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죽었다. 그의 인생을 통해 <이생규장전>을 이해해보면 그가 결국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위로’였다. 


 내가 호기심에 담장을 엿보자 나에게 모든 것을 줘놓고 그 모든 것을 다시 앗아가는 것은 나에 대한 세상의 횡포였다. 김시습은 그런 세상의 횡포로부터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했다. 김시습은 전하고자 했다. 너에게 최랑과 같은 존재가 없어도, 혹은 최랑과 같은 존재가 너를 떠났어도 그건 네 탓이 아니야. 네가 그렇게 힘든 것은 네 탓이 아니야. 어리석은 세상 탓이야. 김시습은 이야기를 함부로 행복하게 끝내지 않았다.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그 안에는 따뜻한 위로가 담겨져 있었다. 


 15C의 작품이 21C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이런 감흥을 줄지 몰랐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꿈을 위해 혹은 취업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우리 모두가 참 어여쁜 것 같다고. 동시에 그 모든 모습들이 너무 어여뻐 어엿비 생각될 때가 있다. 하지만 15C 그 세상에서 이생은 능동적으로 담을 엿보았고 그 작은 행위는 이 소설을 대표하는 제목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세상의 횡포 속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능동적인 행위가 내 제목이 되는 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작지만 소중한 ‘능동적인’ 행위들이 이후에 내 제목을 이룰 것이다. 이생에게처럼 21C를 살아가는 내게도 내가 하는 행위들이 나에게 해피엔딩의 결말만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 행위가 훗날 나에게 의미 있는 제목으로 다가오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열심히 나만의 담장을 엿본다.


2019.10.23               


                               






















작가의 이전글 파라아이스하키, passion connected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