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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벤에셀 Apr 02. 2021

행복이 꼭 기쁨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이만하면 썩 괜찮게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닌가

삶은 모호함 투성이다. 스무 살이 되고, 스물한 살이 되고, 스물두 살이 되고, 어느덧 스물다섯이 될 동안 나에겐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나는 왜 감사한데 행복하지는 않을까?’였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인생에 늘 감사하려 했다. 내 그동안의 삶이 평탄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감사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감사한 생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행복해하지 않아 하는 내가 나는 때로 배은망덕한 것 아닌가 생각했었다. 욕심이 너무 많은 것 아닌가 생각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행복해할 수 있는데 너는 왜 아직도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를 못하니?’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행복해하지 못하는 나를 가장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언제나 나에게 가장 폭력적이었던 사람은 나였다.


지금의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되기까지 나는 참 오랜 시간 나를 미워했었다. 나를 미워하고 미워하다 어느 순간 나를 너무 미워하는 내가 너무 안쓰러워졌던 어느 날 밤, 모두가 잠들었던 그때, 나는 진짜 나를 마주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나와 절대 떨어질 수 없는 단 하나의 존재가 있다면 그게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죽기 전까진 절대 헤어질 수도, 안 볼 수도 없는 존재. 그 존재를 미워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래서 그날 나는 왜 미워하게 되었는지도 명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던 나를 사랑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친구와 싸운 뒤에 화해를 했다고 한 순간에 친구 사이가 원래처럼 가까워지는 것은 아닌 것처럼 내가 가지고 있던 자기혐오의 감정이 자기애로 바뀌기 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내가 처음으로 나를 바라봐 주었던 그 날, 그 새벽의 기억은 강하게 내 마음에 각인이 되어 적어도 내가 이제는 나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게끔 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나를 사랑하게 되었고, 방치해 두었던 나를 돌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서서히 나의 삶과 운명에까지 감사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삶이 나를 정말 힘들게 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나는 네 삶에 만족하냐는, 감사하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행복하냐는 질문에는 그 어떠한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가 없었다. 이게 내가 가진 가장 큰 의문이었다.

‘넌 진짜로 감사하지는 않은 거야. 솔직히 말해봐. 감사한 척을 하고 있는 건 아니야? 네가 네 삶이 진짜 감사하다면 왜 행복하지 못하지?’라고 감사함을 느끼면서도 행복해하지는 못하는 나를 나는 또다시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감사한 삶 속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나의 모습에 이유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대체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내가 나의 삶에 감사함을 느끼지 못했다면 오히려 답이 쉽게 나왔을 것이다. ‘주어진 삶이 감사하지 않으니까 행복하지 않은 거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틀린 답 일지 언정 적어도 명확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의문의 답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왜 내 삶에 충분히 감사해하면서도 늘 행복하냐는 질문 앞에서는 머뭇거리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행복은 머뭇거림 그 자체인 것일까?


 그러다 나는 한순간에 모든 게 분명해지기를 바랐던 게 욕심인 것 같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행복의 상태를 ‘행복하다’와 ‘행복하지 않다’만으로 이분법적으로 해석해왔다. 정작 나는 ‘행복하다’와 ‘행복하지 않다’ 그 두 가지 모두에 속하지 못했으면서 말이다.


누군가는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행복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실 행복하지도, 행복하지 않지도 않은 것 같다.


‘행복’에 ‘분명함’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행복하다’와 ‘행복하지 않다’라는 말은 지나치게 명쾌해서 오히려 더욱 모호하다.


‘행복하지 않다’라는 말의 반대말이 ‘행복하다’가 아니라 그저 ‘행복하지 않지 않다’인 거라면, 지금 행복하지 않지 않은 나도 썩 괜찮게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


‘행복하다’라는 말을 통해 너무 빨리 삶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 오히려 내 욕심이었던 것은 아닐까?


삶은 명확하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매 순간 모호하게 느껴지는 것일 뿐일 텐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행복하다’라는 명확함을 얻고자 애쓰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 나에게 행복하냐는 질문을 해온다면 분명하게 ‘행복하지 않지 않아’라고 대답하기로 했다.


모호한 것 투성이인 삶 속에서 분명함을 추구하려하기보다 이제는 차라리 나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모호한 것들을 사랑하려 한다.


행복하냐는 모호한 질문에 ‘행복하지 않지 않아’라는 더 모호한 대답을 내놓으며 지금의 내가 느끼는 행복은 무엇인가 분명하게 마주해 보려 한다.


모호한 삶 속에서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추구하는 가치인 행복은 삶만큼이나 모호한 것일 테다. 그러니 나는 행복을 모호하게 느끼고 있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저 지금의 삶에 감사해할 줄 안다면, 그런 삶 속에서 ‘행복하지 않지 않다’라는 정도의 대답만 할 수 있다면, 충분히 괜찮은 것 아닐까?


때론 압박처럼 다가오기도 했던 ‘행복하자’라는 생각을 내려놓으니, 나는 오히려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는 내가 되었고 좀 더 편안해질 수 있었다. 행복을 애써 추구하지 않으니 오히려 행복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내가 내 삶 속에서 찾은 나의 행복은 행복하지 않지 않은 상태에서의 고요함과 평온함인 것 같다.

행복하지 않지 않은 지금도 꽤 괜찮다. 그저 고요한 마음만이 드는 지금도 좋다.


그리고 그렇다면 나는 지금 제법 행복한 상태이다.

행복이 꼭 기쁨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무표정의 나도 지금, 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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