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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벤에셀 Apr 01. 2021

하루 몫의 균형

아이들 틈 속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선명함, 그 안에서의 균형

자기 본위에 맞게 사는 삶이 꼭 자기 삶에 대한 확신이나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요즘에는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나답게 사는 삶을 만들어가는데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예전에 나는 마음이 흔들릴 때면 ‘나는 나를 믿는다’라는 말을 많이 하곤 했었다. 나에 대한 믿음을 되뇌며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을 잃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요즘엔 ‘나는 나를 믿는다’라는 말 보다

‘나는 나를 사랑하니까 됐다’라는 말을 더 많이 한다. 무수히 흔들렸던 순간들에 내가 그저 단 하루 몫의 균형을 잃지 않고 하루의 시간을 제대로 서 있을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은 대개 나에 대한 믿음보다는 사랑이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하루하루 속에서 나는 그저 단 하루 몫의 균형만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그렇게 균형을 잡으려 뒤뚱대는 시간의 틈 속에서, 때론 나에 대한 믿음마저 흔들렸던 순간에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만 잃지 않는다면 나는 결국에 내 본위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데 조금씩 수렴되어갈 수 있었다.


믿음이 단단한 성질을 가졌다면 사랑은 유연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요즘의 나에겐 스스로를 다잡으려는 단단함 보다는 나를 조금 더 편안하게 풀어줄 수 있는 유연함이 더 필요한 것 같다. 무엇 하나 분명히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내 본위에 맞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 마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나에 대한 강한 믿음보다는 오히려 나까지 나에 대한 사랑을,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한 사랑을 차마 잃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연약한 애정 때문이었다.


어느 날 아라찌는 이제 막 실뜨기를 배웠는지 같이 실뜨기를 하자며 실타래에서 실을 조금 풀어 왔다. 처음 하는 놀이는 언제나 흥미롭듯 아라찌는 요 며칠 계속 실뜨기를 하자며 실타래를 가지고 다녔다.


그렇게 아라찌와 함께 나는 한 15년 만에 실뜨기 놀이를 해보았다. 실뜨기 함정에 걸려 실이 다 풀리기도 하고 실이 꼬여 엉킨 실을 다시 풀어야 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하는 실뜨기 놀이가 나에게도 꽤나 흥미로웠고 반가웠다. 그리고 실뜨기를 한 것만큼이나 실타래를 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아라찌와 오랜만에 실뜨기 놀이를 하면서 나는 엉킨 실타래도 참 오랜만에 풀어보았다. 그렇게 얼기 설기 엉킨 실타래를 풀며 ‘온전함’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엉켜버린 것을 풀어낸다는 것은 원래의 온전한 모습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래의 온전한 모습을 되찾고자 애를 써서 저마다의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어내곤 한다. 그런데 애쓴 끝에 어렵게 풀어낸 그 실타래는 정말 찾고자 했던 본래의 그 온전함을 되찾게 될까? 힘 들여 풀어지는 과정 속에서 해져버려 오히려 본래의 모습과는더 멀어져 버리는 건 아닐까?


엉켜버린 실타래를 공들여 푸는 것만이 ‘온전함’을 향한 정답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엉켜버린 실타래를 푸는 그 과정이 만약 너무 괴롭다면, 그냥 그 엉킨 실타래의 부분을 풀어내지 않고 잘라내도 되지 않을까?


그저 온전함을 되찾고 싶다는 그 마음만 온전히 놔둔 채, 나를 힘들게 하는 엉킨 부분은 애를 써가며 풀어내지 않고 미련 없이 잘라내도 괜찮지 않을까?


이미 너무 많이 엉켜버린 실타래라면, 그렇게 애를 써서 풀어내도 남게 되는 건 막상 내가 원했던 온전함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엉켜 있었을 때보다도 더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어떤 실체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온 힘을 들여 실타래를 풀어내도 내가 바랐던 온전함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고, 엉킨 부분을 풀어내지 않고 그냥 잘라냈을 때 의외로 예상치 못한 새로운 온전함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엔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는 것도, 풀지 않는 것도 나의 선택이다. 선택은 나의 몫으로 남는다. 나는 그저 내가 더 행복할 것 같은, 진짜 온전함에 가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선택을 하면 그만이다.


나의 경우, 나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이 힘겨워 그냥 그 실타래를 던져버리고만 싶었을 때 아이들을 만나게 됐다. 그리고 그때 아이들 틈 속에서 엉킨 실타래를 끙끙 대며 푸는 것을 멈추고 그 엉킨 실타래를 그냥 싹둑 잘라내버렸다. 그때 새로운 온전함을 마주할 수 있었다.


마치 회색 인간처럼 회색빛의 시간만을 보내던 내가 주말마다 무지개빛을 내뿜는 아이들을 만나고 올 때면 내 내면을 색칠했던 회색빛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내 안에 내가 좋아했던 파스텔 톤의 색들이 다시 희미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 틈 속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선명함이 좋았다. 어디서도 느낄 수 없었던 그 선명함을 통해 나는 애쓰지 않고도 하루 몫의 균형을 잘 잡아나가며 조용히 나의 하루들을 지나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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