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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 Dec 24. 2021

돌아가신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전화벨 소리 대신 진동이 계속 울리고 있다. 화면에 떠있는 번호는 올해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20년 가까이 쓰시던 번호였다. 연락처 정리를 하다 아직 번호가 저장되어있는 걸 보고 지울까 말까, 번호 조각을 엄마의 흔적 삼아 더듬던 찰나 터치를 인식한 핸드폰에 전화통화버튼이 눌렸다. 당연히 없는 번호라고 말할 줄 알았던 음성 대신 신호음이 났다. 너무 놀라 당장 전화를 끊고 잠시 동안 생각해보니 번호를 다른 사람이 받아갔음을 깨달았다. 


 20년 가까이 쓰던 번호기에, 정리하지 못한 연락이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문자를 남겼다. 이 번호는 어머니께서 쓰던 번호이며, 혹시 어머니를 찾는 전화라면 제 쪽으로 전화를 부탁드린다고. 최대한 감정이 뒤섞이지 않은 말을 고르고 정중한 어투로 작성했다. 몇 분 뒤 전화가 왔다. 전화번호를 띄우는 화면과, 진동이 계속 울리고 있다. 


 쉬이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어무니'라고 발신자의 번호를 등록한 호칭이 떠있다. 그 몇 초 동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초대해도 내내 올 생각이 없던 그리움이 사무칠 정도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핸드폰 진동이 울리는 사무실엔 나뿐만 아니라 상사와 상사의 손님도 계셨다. 계속 울리게 둘 수 없어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보다 좀 더 젊은 여성분이 전화를 받으셨다. 최근에 번호를 바꿨는데 안 그래도 먼저 쓰던 사람을 찾는 전화가 많아 곤란했다고 하셨다. 사정을 말씀드렸고 같은 내용으로 연락이 오면 제 쪽으로 전화를 달라고 말했다. 잠깐 망설인 후, 뜬금없이 잘 지내고 계시냐고 안부인사를 전했다. 갑자기 안부인사를 받아 당황하셨을 여성분은 조금 쑥스러운 목소리로 잘 지내고 있다고 답해주셨다. 잘 지내고 있다고. 얼굴도 모르는 타인이 전해준 안부인사는 가슴속 단단한 응어리를 말랑하게 반죽해줬다. 한껏 부푼 식빵 반죽처럼 몽글몽글한 기분에 사로잡혀 전화를 끊고 한동안 그분의 목소리와 말을 반추해봤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언제든 전화해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동안 먼저 전화를 건 횟수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만큼 적었다. 먼저 전화를 걸어오셨고, 잘 지내냐는 말을 먼저 하셨다. 그저 그렇지. 시큰둥한 말투로 답하던 목소리엔 용건을 빨리 말해달라는 문장이 적혀있었다. 먼저 전화를 걸지 않아도 먼저 말하지 않아도 항상 들려오던 말이기에 더더욱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쓰는 게 습관이 되어 다이어리에 빽빽하게 적힌 일기는 항상 같은 말로 끝난다. 잘 지내고 계시냐고.


 사무실에 나 혼자 있는 게 아니었기에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하는척하며 젖은 눈시울을 감춰본다. 아직 여성분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맴돈다. 업무를 위해 모니터를 봤지만 빈 페이지에 역사를 기록하듯 머릿속을 홀로 날아다니는 펜은 까만 글씨로 같은 말을 새겨 넣는다. 잘 지내고 있어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늘이 보이는 자리가 아니지만 내리는 눈은 볼 수 있었다. 하늘하늘 흩날리는 눈이다. 펑펑 쏟아져 소복소복 쌓이기보단 잠깐 말을 전하러 내려온 가벼운 발걸음이다. 


엄마, 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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