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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 Dec 30. 2021

10번째 다이어리

 택배 박스를 와르르 내려놓는다. 하나하나 뜯다 보니 무언가 빠져 있어 의아한 표정으로 빈 상자를 이리저리 뒤져본다. 그제야 택배로 받을 상품이 아니라 이메일로 받을 상품임을 깨닫고 곧장 포털 사이트로 로그인을 해 메일함을 확인했다. 미리 주문한 상품이 와있었다. 나의 10번째 다이어리. 


 책상 한 편엔 다 쓰지도 못한 다이어리가 다섯 개 하고도 네 개나 진열되어 있었다. 나무에게 절을 올리며 사과해도 시원찮을 태도로 1년에 한 번씩 다이어리를 산 지 벌써 10년째. 이번에 산 다이어리는 종이로 된 다이어리가 아닌 아이패드에서 굿 노트 앱으로 불러와 사용할 수 있는 다이어리 속지 파일이다. 아이패드를 사고 몇 달째 이것저것 시도해본 결과 종이보다 디지털로 작성하는 쪽이 더 잘 맞는다는 걸 알아 과감하게 새해 다이어리를 사버렸다.


 굿 노트 앱을 켜고 사파리 브라우저로 메일로 받은 PDF 속지 파일을 다운로드한다. 속지의 칼라는 사랑하는 분홍색보다 무난하게 쓸 수 있는 하늘색을 골랐다. '상품'이기 때문에 판매자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예쁜 속지와 각각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하이퍼링크가 걸려있어 먼슬리, 위클리, 노트 등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새로 받은 속지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한 해의 행사와 당장 다음 달에 치러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간단하게 정리해본다. 대강의 일정을 써보고 그 밑으로 일정의 자세한 내용을 적어놓는다. 글씨를 예쁘게 쓰는 데에 공 들이지 않는다. 아이패드로 쓰는 다이어리의 최고 장점은 글씨를 잘 못 써도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고 지울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전의 나는 다이어리를 쓸 때 업무일지를 작성하는 것보다 훨씬 공을 들였다. 다이어리를 완벽하게 작성하기 위한 '기분'을 만들기 위해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우유를 한 잔 마시고, 글씨가 예쁘게 써진다는 비싼펜으로 한자한자 또박또박 글씨를 써 내려갔다. 당연히 매일 작성하기 버거웠다. 쓰고 싶은 말은 산처럼 쌓여있는데 예쁘게 작성하는 것에 연연하다 보니 글씨 한 글자만 삐뚤게 써져도 기분에 무거운 돌이 내려앉아 더 이상 작성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만년형 다이어리에 날짜를 잘 못 써서 더 이상 쓰지 않고, 날짜형 다이어리는 글씨가 안 예쁘게 써져서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쓰는 일 자체를 그만두게 되고. 남에게 보여주는 일기가 되어가는 다이어리는 날이 갈수록 밀리고 빈 공간이 많아져 손을 놓게 되었다. SNS에 다이어리를 검색하면 볼 수 있는 예쁜 손글씨로 빼곡하게 적혀있는 다이어리를 바라보며 나도 완벽하게 작성하고 싶다는 강박에 빠져 즐겁게 기록하는 행위가 아닌 노동이 되어버렸다.


 쓰기 좋고 비싼 펜과 다이어리를 다 사봤지만 주인이 기록을 하지 않으니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런 내게 글씨를 잘 못 써도 바로 지우고 다시 작성할 수 있는 아이패드 다이어리는 적성에 맞다 싶을 정도로 내 성향에 어울렸다. 한 달 주기로 작성할 수 있는 다이어리를 쓴 지 어느새 6개월, 이 정도면 1년용 다이어리를 사서 써도 되지 않을까 해 고르고 고른 아이패드 굿 노트용 날짜형 다이어리 파일을 어제야 메일로 전달받게 되었다. 


 년 단위로 계획을 작성할 수 있는 페이지에 제일 먼저 내 생일을 적어놓고 가족과 친구들의 생일을 적어 넣는다. 그리고 다음연도에 쉬는 날이 몇 개인지 세어본다. 빨간색이 적으면 적을수록 새해 시작 전부터 울상이 지어질 것 같지만 뺨을 꾹꾹 눌러 입꼬리의 방향을 달리 해본다. 당장 다음 달 행사를 먼슬리 페이지에 적으며 다시 날짜를 확인해보는 일은 흐릿한 기억을 복기해보는 일과 닮았다. 글씨가 예쁘게 써지지 않아도 계속 작성하고, 단어를 잘 못 쓰면 얼른 지우고 다시 작성한다. 강박을 잠시 내려놓고 하는 것 자체에 집중하면, 꾸준히 해나갈 힘을 주곤 한다. 


 이번 달까지, 내일까지 마무리할 한 달용 다이어리의 남은 속지 파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손가락을 화면에 대고 움직이며 그동안의 기록물을 찬찬히 훑어본다. 글의 구성 방식 따위 상관치 않고 느끼는 대로 써 내려간 기록은 느낀 그대로, 생각한 그대로 여과되지 않은 채 담겨있다. 지나간 기억을 훑어보면 그때는 그랬었지, 피식 웃음이 흐르곤 한다.


 내게 보여주기 위한 기록은 생각지도 못한 일에서 도움을 받을 때가 많다. 지난번에 간 식당이 맛있었는지부터 비슷한 상황의 문제의 해결점을 찾아가는 방법까지 적혀있다. 어찌 보면 나만의 공략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이패드의 배터리가 다 닳도록 구경하고 있으면 과거의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어찌나 많아지는지. 정제되지 않은 원석처럼 빼곡히 박힌 글 중에서 여러 가지 보석을 찾아낼 수 있으니 지속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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