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숙 개인전 <식물의 언어>
*무등현대미술관에서 11월 9일부터 12월 9일까지 진행 중인 전시입니다.
광주의 무등산 근처에서 식물에 관한 전시라니! 이보다 잘 어울릴 수는 없었다. 평일 오전, 아무도 없는 미술관은 마치 전시회 바로 전날 같았다. 세팅은 다 돼 있고 그것들의 위치나 기울기를 하나하나 체크하는 큐레이터의 마음으로 전시를 여유롭게 둘러봤다.
<식물의 언어>는 작품 세계 속 자연의 투사체이자 중재자인 새를 따라 관람하면 훨씬 그 세계에 깊게 접근할 수 있다. '바람의 둥지' 연작에서 새는 모든 계절에 존재한다. 계절의 바람이 만든 둥지는 생명이 탄생하는 공간일 뿐 아니라 생명이 사랑하고 성장하고 변화하는 공간이다. 그 속에서 일어난 새의 탄생은 '식물의 언어'로 말하자면 희망이자 숲이자 꽃밥이다. 여기서 새의 역할은 중재자다. 꽤 많은 수의 식물들이 새를 통해 씨를 퍼트리면서 번식하기 때문이다. 씨앗을 몸속에 지니고 있다가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새에게 숲이나 꽃의 형상이 깃들어 있다는 식물(자연)의 믿음은 식물(자연)을 넘어 그것을 보는 인간에게까지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새의 중재자적 역할은 신화나 민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새는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중재자이자 영적인 존재로 취급됐다. 어릴 적 빠진 치아를 지붕 위로 던지면 새가 물어간 뒤 새 이가 난다거나 황새가 어린아이를 물어다 준다는 등의 이야기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신화적이고 영적인 존재인 새는 조성숙 작가의 자연 세계에서도 그 면모를 드러낸다. 식물과 대지, 나무와 꽃을 이어주는 새는 더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꾀하는 존재로 취급받게 되는 것이다.
숲의 기원, 꽃의 탄생과 같은 비밀을 밝히면서 작가는 더 넓은 세계를 보여준다. 새의 중재 아래 탄생한 숲의 모습이 그것이다. '사슴섬'으로 대표되는 작가의 생태계는 인간과 자연이 공존한다. 사슴섬 속 사슴과 사람은 의자를 가운데에 두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빈 의자에 사람이 앉아 있지 않는 모습은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어느 한쪽을 낮추지 않는 자세를 나타내는 것만 같다.
이어지는 '사슴의 은신처'와 '자화상'은 사슴섬과 같은 자연에 동화된 동물과 인간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 특히 '자화상'은 작가의 바람, 인간과 자연 중 어느 한쪽이 우위를 점하지 않는 상황을 표현해낸다. 자연으로 잠식되는 인간은 결국 자연의 요소들과 닮아가며 최종적으로는 자연과의 동화를 꿈꾼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관객은 작가의 생태적 감수성을 느끼게 되며 그것에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자유로움을 새로 표현하는 여러 문학 작품들을 읽으면서 내가 아는 여러 새들을 떠올려본 적이 있다. 날 의지가 없는 시내의 비둘기, 새장에서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울던 카나리아, 다니던 학교에 유난히 많던 물까치까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들은 더 이상 자유의 상징이 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상적인 생태계 속에서 자유로운 새의 모습은 현대인들이 갈망하는 이상향일 수도 있다. 자유로운 새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자연에 속해 있고 싶다는 열망은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가 꽤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벽 쪽으로 너무 가까이 있는 작품을 전시장 한가운데에 놨다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시 속 자유의 상징과도 같은 'Tower of colorful birds'가 모든 작품들의 사상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했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
전시는 막바지로 향한다. 마지막으로 가기 전에 시골에서 보냈던 때를 떠올려 보면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운동장 전체가 플라타너스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여름이면 두 손과 얼굴을 다 덮을 정도로 큰 잎들이 손 닿지도 않을 곳까지 길게 뻗어있었고 비가 온 다음 날엔 플라타너스의 짙은 냄새를 맡으며 뿌리가 쉽게 들리는 잡초를 운동장에서 줄지어 뽑았다. 가을이면 찬바람에 바삭하게 구워진 잎들을 주워다 리어카에 싣고 한 구석에다 가져다 버렸다. 그렇게 버려진 잎들은 우리들의 이불, 베개였고 잘게 부서진 밥, 반찬, 그릇이 되고 아침 이슬에 축축하게 젖으면 수많은 색종이가 됐다.
이런 생각들은 더 많은 것을 보게 한다. '물고기 숲'에서 볼 수 있는 숲은 기존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상상의 공간이다. 작가는 차례로 상상을 확장시키다가 결국 생명의 원천인 바다와 숲을 결합시킨다. 숲과 바다는 모두 생명들이 태어나고 끊임없이 순환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자궁과도 같은 두 개의 환경의 결합으로 인해 작가의 생태계는 모든 걸 포괄하는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런 세계의 원리 속에서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생명의 원리를 주창할 수 있게 된다.
여기까지 밀고 나간 작가의 세계는 다시 한번 새라는 존재에게 회귀한다. 이때 새는 세계의 투사체다. 새 안에 담긴 꽃과 숲, 인간과 생태, 바다까지 새는 세계를 응축해 놓은 존재로서 바람의 둥지에 머무른다. 앞에서 보았던 사계절의 둥지 속 새의 모습에서 가장 주목하고 싶은 건 가운데에 위치한 둥지 속 알이다. 새의 탄생은 '식물의 언어'로 희망이며 희망의 원형적인 모습인 알은 또한 세계의 원형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세계의 원형을 가꿔내는 바람과 자연의 모습, 그 모든 것을 함축하는 새, 그것의 원형인 알이 서로 순환하는 모습을 전시 전체를 거쳐 잘 표현돼 있다.
여기까지 왔다면 우리는 자연의 순환 원리를 알 수 있다. 이제 여러분이 할 일은 전시를 처음부터 다시 천천히 보는 일이다.
https://www.artlecture.com/article/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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