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하카타와 유후인 그리고 나가사키
작년 이맘때였던 것 같다. 4개월 간 했던 현장실습을 마칠 즈음 문득 다른 나라에서 연말을 보내고 싶었다. 물론 준비는 한 달 전부터 회사 컴퓨터와 복사기를 이용해 해왔지만 막상 실습이 끝나고 인천공항으로 가던 날 불던 바람은 유난히 상쾌했다. 후쿠오카의 야경과 모츠나베, 유후인의 료칸과 온천, 나가사키에서 먹을 카스텔라는 생각만으로도 짜릿했다.
하카타
자고로 겨울에 떠나는 여행은 든든해야 뭐든 보이는 법이다. 태어나서 오므라이스를 먹기 위해 줄을 설 줄은 몰랐다. 한국어 버전 간판에 적혀 있는 글씨, '한국인에게는 느끼할 수 있다'라는 글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봉곳하게 올라간 계란이 너무 잔망스러워서 내 손으로 저걸 가르지 않곤 후회할 것만 같았다. 식당의 경고대로 살짝 느끼하긴 했으나 마구로동에서 와사비와 된장국을 뺏어다 번갈아 먹으면 충분히 먹을만했다.
편의점에서 산 푸딩을 먹으며 여행 첫 날을 기념하기 위해 후쿠오카 타워로 갔다. 곧 크리스마스라고 나무마다 파란 조명이 달려있는 모습이 꽤나 예뻤다. 으레 높은 곳에서 보는 야경이 그렇듯이 멍하니 그저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게 사실 서울이야'라고 누가 말한다고 해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한참을 보고 있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타워를 내려왔다.
맥주를 샀다. 아사히, 공장이 후쿠오카에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 있었다. 찬바람도 들지 않는 연말의 밤 중 하루가 지나갔다.
유후인
유후인으로 떠나던 날은 유난히 바쁜 날이었다. 하루 만에 숙소를 옮기는 날이기도 했고 2시간 반 정도 버스를 타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료칸에 짐을 맡기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하나노소바', 여기서 먹은 계란구이 때문에 나는 지금도 소바집을 가면 계란구이를 꼭 사이드로 시키곤 한다. 료칸마다 피어오르는 연기와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대류 하는 유후인의 맛은 담백했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유후인은 밤이 더 낭만적이다. 료칸에서 저녁을 먹고 나베가 맛있다는 이자카야를 찾아서 차분하게 걸었다. 분주하던 거리도 저녁이 되면서 일찌감치 눈을 감았다. 하지만 가득 찬 물안개와 입김 사이로 하늘을 쳐다보면 내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별자리들이 가로등 대신 길을 밝혔다. 볼이 발개지고 온천물에 젖었던 머리가 마를 무렵 이자카야에 도착했다.
거기서 유미코 아주머니를 만났다. 혼자서 한국어 메뉴판에는 없는 음식을 먹으면서 맥주를 한 잔 하고 계셨는데 먼저 말을 걸어왔다. 파파고를 켰다. 나베가 나오기 전까지 무슨 대화를 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서로 다를 것 같다. 나는 분명 한국에 대한 이야기와 유후인 숙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왼손에 낀 반지가 결혼반지가 아니라 커플링이라는 사실, 유미코 아주머니가 가르쳐주는 일본어 교실 같은 느낌의 대화를 했다.
덕분에 맥주를 한 병 얻어먹었다. 사진 찍기 부끄러워하는 분들 잡고 사진도 찍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이 만나 나누는 불완전한 대화는 다음에 만날 여지를 충분히 남길 수 있었다. 다음에 유후인에 와서 이 시간에 이곳을 온다면 유미코 아주머니가 '곤니찌와' 하고 인사할 것만 같다. 그러면 우리는 또 연말에 나누는 불완전한 대화에 온 신경을 집중한 채 맥주를 나눠 마신 뒤 '사요나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유후인을 둘러싼 산에서 내려오는 찬 바람과 취기에 료칸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지러웠다. 료칸의 코타츠에 들어가 온몸을 맡긴 채 잠들었다.
다음 날 새벽, 마지막으로 온천에 들어갔다. 뿌옇게 낀 수증기 속에서 탕에 담가진 몸과 바깥에 나온 얼굴의 온도차를 느끼며 겨울이 한발 더 다가왔음을 실감했다.
나가사키
나가사키, 카스텔라와 짬뽕이 가장 유명하지만 일본에 오면 꼭 먹는 스시는 이곳에서 먹고 싶었다. 무려 손으로 집어먹는 스시다. 다찌 밑으로 손을 씻을 수 있는 물이 있고 손을 씻고 나면 바로바로 만들어 주는 스시를 손으로 먹을 수 있었다. '와사비 이빠이?'라고 묻는 주인에게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빠이데스!'라고 외쳤다. 바로 앞에서 만들어지는 스시는 역시 언제나 맘을 설레게 한다. 운이 좋다면 재료 수급 문제로 고래스시도 먹어볼 수 있다. 물론 나는 수급 문제로 먹었다.
옆에는 나가사키 부둣가에서 봤던 크루즈를 타고 여행을 하는 부부가 있었다. 한국의 부산, 서울 등을 다녀왔다며 우리에게 말을 하는 그들의 눈은 호기심이 가득했다. 우리는 생각보다 신기한 존재였나 보다. 역시나 왼손에 낀 반지에 대한 질문도 빠지지 않았다. 준비된 스시가 다 나오고 손을 닦았다. '오이시!'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배를 통통거리며 나가사키 노면 열차 길을 따라 걸었다.
나는 밥을 적당히 먹고 먹는 오후의 커피를 굉장히 좋아한다. 특히 원두를 갈 때 나는 소리와 향, 그것을 거름망을 설치한 포트에 내려 깔끔한 원두커피와 먹는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한다. 나가사키 카스텔라는 한국에서도 몇 번 먹어봤지만 계란과 꿀을 잔뜩 넣어 찐득한 빵의 식감과 함께 밑부분에 깔린 설탕 결정 씹히는 맛이 꽤나 그럴싸한 디저트다.
옛 분위기를 유지한 쇼오켄의 2층 카페에서 먹는 커피와 디저트는 분명 나에겐 사치였다. 여행에선 누구나 졸부가 된다. 서울이라면 먹을 엄두를 안 내는 가격이라도 왜 여행에만 오면 적당한 가격으로 둔갑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날만큼은 나의 몸은 프랑스 살롱의 부르주아에 빙의해 있었다. 당일로 나가사키를 오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왕복 5시간이 넘기 때문에 저녁은 몸보신을 할 필요가 있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저마다의 이유로 하카타역을 배회하거나 가게로 들어가 국물로 몸을 녹였다. 모츠나베, 우리나라 말로 곱창전골쯤 된다. 후쿠오카에 오면 꼭 한 번은 먹어야 한다는 말에 우리도 어김없이 모츠나베를 먹었다. 지친 몸에 맥주 한 잔과 진한 국물,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다리가 풀리고 머리가 띵했다. 친구들의 연말 모임 소식이 여기저기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도망치듯 떠나온 후쿠오카 여행이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생각난다. 연말의 들뜬 분위기, 화려한 조명, 쇼핑과 맛있는 음식 등 모든 게 다른 나라에서 펼쳐졌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연말의 밤, 나는 그곳을 항상 헤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