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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코는 왜 Feb 21. 2019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

소설시장 페스티벌, <날개>

소설시장 페스티벌

한 달 전 혜화를 걷다가 한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소설시장이란 이름의 연극 페스티벌,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소설들을 연극으로 각색해 공연한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이상의 <날개>가 너무 궁금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유명한 첫 구절만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나에게 다분히 난해한 말을 뱉으며 '나중에 크면 너도 알게 될 거야'라며 머릿속을 때렸던 그가 지금에 와서 내 앞에 어떻게 펼쳐질지 너무나 궁금했다.


좁은 극장 속 장막을 보는 순간,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단 걸 직감했다. 충분히 공간을 분리하면서도 너머의 이야기까지 볼 수 있는 얇은 장막, 또 그것이 스크린의 역할까지 수행했을 때 더 좋을 수 없는 선택이라 생각했다. 그 속에서 시작된 연극,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이중 구조를 가진 연극은 나름 새로웠다. 목소리 ASMR을 들려준다며 이상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장면은 누가 봐도 유튜브, 트위치 등의 플랫폼을 떠올리게 했고 시작은 꽤나 설득력 있었다.


소설시장 페스티벌, <날개>


하지만 그 이후 진행된 이야기들은 다소 어수선했다. 우선 이야기(현대의 유튜버) 속 이야기(소설 '날개')의 시점은 너무 난삽했다. 그 예로 극 중 '이상'이 소설 속 문어체와 현대의 구어체를 섞어 사용한 것, 'ASMR을 하는 화자'의 장소로 가 소설 속 장면(화장품 냄새를 맡는 것)을 연기한 것, 조명의 불분명한 사용으로 인물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진 장면 등이 이상의 위치를 불분명하게 했다.


또  'ASMR을 하는 화자'에게 너무 많은 역할을 부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와의 조합을 의식해서일까 이게 주인공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지 'ASMR을 하는 화자'의 말을 통해 전달되는지 헷갈리는 순간 이야기가 힘을 잃고 말았다. 때문에 이 연극은 현장의 생생함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한 발자국 뒤에 있는 느낌이었다. 이 부분은 각본과 연출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관객으로서 이 고민이 계속될 때 이상과 금홍은 마치 꼭두각시처럼 보인다. 결국 전달되는 이야기는 마주치는 현실보다 분명 약하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만 것이다.


그렇다 보니 관객들은 계속 자기들이 보고 있는 시점과 극 중 시점을 일치시키려 노력하게 된다.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게 아니라 한 번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지점이 반복되면서 관객은 피로를 느끼게 되고 결국 연극이 절정으로 감정선을 이끌어 가다 터트리는 순간 카타르시스를 느껴야 할 관객은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모든 상황과 잡념과 개인이 부서지는 파멸의 순간, '그만!'이라고 외치는 그 순간이 마치 콩알탄처럼 느껴지며 연극 전체의 완성도가 낮아지고 만 것이다.


처음 들어왔을 때 무대를 보는 순간만 하더라도 이상이 어떤 모습으로 날아오를지를 기대했지만, 결국 이상은 두 번 박제되고 말았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라고 누가 묻는다면 '알았는데, 이젠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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