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자기 앞의 생>
명동을 갔다. 중국인이 만든 마라탕을 먹고 이탈리아에서 배워왔다는 디저트를 먹고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의 소설을 각색한 연극 '자기 앞의 생'을 보러 서울 한복판에 왔다.
유태인 로자 할머니와 무슬림 꼬마 모모의 이야기, 주요 두 인물의 설정에서도 알 수 있듯 인종과 종교 등 다름의 요소를 빼고 이 연극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제치고 이 연극의 모든 요소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해보려 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로자가 모모를 위해 차려준 뜨거운 수프와 부드러운 빵이 이 연극의 전체적인 온도를 만들어냈다. 단순히 모션이 아닌 진짜 연기가 나는 수프를 먹는 모습은 연극 전체를 따뜻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연극이 끝난 후 가졌던 제작진과의 만남에서 누군가 남긴 평이다. 내가 이보다 이 연극을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인종과 종교, 아우슈비츠, 창녀 이런 무겁고 예민한 사안들을 다루면서도 그것들을 관통하는 주제가 떠오르는 태양처럼 밝은 것은 연극 전체의 온도가 따뜻하기 때문이다. 로자와 모모가 만들어 내는 대화와 믿음, 그리고 그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서 보이는 사랑이 그 온도를 발산한다.
그런가 하면 연극에서는 두 가지가 대비되곤 하는데 앞서 말했던 로자와 모모의 애틋한 사랑, 이것은 수프의 온도와 로자가 지하실에서 밝힌 촛불 등에서 나타나는 따뜻함과도 직결된다. 또 하나는 무대 장치로 활용한 푸른빛의 문이다. 그것은 지하실로 통하는 입구가 됐다가 모모가 로자를 떠나보낸 후 로자를 데리고 퇴장하는 은밀한 미지의 영역이다. 이는 사랑으로 격앙된 분위기를 죽음과 미래라는 불안정하고 차분한 이야기로 환기시키곤 한다. 연극은 이런 대비를 통한 삶의 아이러니 또한 잘 보여준다.
이런 요소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누군가 사랑할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다. 로자가 죽고 난 후 남겨진 모모의 춤이 또 걸음이 불안해 보이는 건 이런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 불안한 발걸음으로 도달하는 곳이 다른 사람의 품이라면 다시 한 편의 연극이 시작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결국 그가 향할 수 있는 곳은 아무도 모른다. 로자가 그토록 싫어했던 궁둥이를 팔아서 살 수도 있다.
끝으로 로자가 혼자 노래를 틀고 추던 춤을 마지막 모모의 춤에 연결시켜본다. 모모는 죽어버린 로자와 춤을 추고 있다. 그런 식으로 어디서 무엇을 하든 결국 모모는 자기 앞의 생을 견뎌내야 한다. 나에게도 생은 견뎌내는 것이었다. 자기 앞의 생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모모의 삶은 다르게 그려질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떤 길이든 분명 로자와의 기억은 그를 묵묵히 걷게 하는 힘이 되리라 장담한다. 아이는 혼자 자라지 않고 사람은 혼자 성장하지 않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