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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코는 왜 Mar 19. 2019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평범하고 찌질한 역사의 중심에 서다

찌질의 역사

나만 그런 건 아니지만 혼자 견뎌내야 하는 찌질한 역사에 서다.


장편영화 한 편을 끝으로 더 이상 이름이 오르지 못한 영화감독, 전 세계 콩쿠르에 다니며 인정받으려 노력했던 현대무용수, 제대 후 파스타 가게를 차렸지만 한 달도 못 가 망해버린 미술학도, 이들은 모두 소설 속 인물들이다. 우리에게 이들은 그렇게 낯선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몇 다리만 건너면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저 평범한 인물들이다. 그렇기에 인물들은 이 소설에서 엄청난 개성을 가진 인물들도 아니고 특별한 활약이 두드러지지도 않는다.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가 찌질하게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자신보다 먼저 성공한 오 감독을 질투하면서도 영화 예매권 30장과 공짜 술에 이끌려 그의 GV에서 사회를 맡은 주인공이나, 도망치듯 자원한 자이툰 부대를 전역하고 항공 승무원을 준비한다고 1년째 놀고 있는 그의 친구 양샤넬이나, 이제는 고리타분하고 뻔한 질문만 하는 어른 미자까지 모두 사는 동안 계속되어 왔고 계속될 서로의 찌질한 역사를 견디고 공유한다. 마치 너무나 평범하기에 치부 하나쯤 안고 사는 우리 주변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인물들은 서서히 우리에게 스며올 준비를 한다.


퀴어와 자이툰 파스타, 낯설고 이국적인

소설의 가장 큰 가치가 실제 삶과의 밀접한 관련성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소설이 개인의 삶 중 한 부분만을 도려낸 것을 넘어 그 단편적인 삶의 경험이 다른 사람의 삶과 일치하고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갖는다는 뜻이다. 소설 속 인물은 자신의 단편적인 경험으로 남들과 공감하면서도 그 이외의 지점들에선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괴리되는 지점들이 하나씩 나온다. 예를 들어 독자와 소설 속 주인공이 같은 나이, 성별, 지역이지만 정치적 생각이 전혀 다르다거나 하는 식이다.


한 인물만의 독특한 지점, 그런 지점들이 많아질수록 인물들은 개성을 가지게 된다. 개성이 도드라질수록 다른 사람과의 공감대가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반대로 적용된다. 강한 개성은 삶의 한 부분이 과장되거나 부풀려서 표현됨을 뜻한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과장된 현실은 오히려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게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과장은 왜곡으로 종종 생각되지만 소설에서 과장된 표현법은 독자 스스로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까지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이 소설에서 선택한 강렬한 개성은 단연 '퀴어'다. '자이툰 파스타'와 같이 낯설면서도 이국적인 이 단어가 주는 생경함은 대부분의 독자를 강렬하게 이끈다.


주류의 개성, 그 보편성을 찾다

위에서 인물들의 개성이 없다고 해놓고 개성이 퀴어라고 하는 것이 모순돼 보일 수 있지만 작가가 소설 속에서 그것을 그려낸 모습을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소설 속 나와 양샤넬은 퀴어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것으로 인한 극적인 갈등이 따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내적 갈등의 요소, 다른 소설들에서 주인공이나 다른 인물들이 가지는 내적 갈등과 같은 것과 같은 일반적인 것! 즉, 주류로 진입하는 데에 성공한다. 거창한 말처럼 들리지만 '주류'의 개성이라는 말은 결국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평범한 것이 된 '퀴어'라는 소재는 때로는 유쾌한 개그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물론 그 개그를 하는 이들이 동성애자이기에 가능한 것이겠지만 그것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이 소설의 가치를 높인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개성을 우리가 무의식 중에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주류의 개성, 그것으로 편승하고자 하는 소설은 그 노력을 우리에게까지 제안한다. 정체성만을 고민하는 퀴어의 시대는 지났다. 평범하고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한 미완성의 존재들, 그 범주에서 우리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우리는 세상의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세상의 아주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 점은커녕 그 어떤 것도 되지 못했다. 인생을 걸고 했던 일들은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되어버렸다. 칸영화제를 가기는커녕 제대로 된 퀴어 영화를 찍지도 못했고, 현대무용가가 되지도 못했다. 보란 듯이 사랑을 하지도 못했고, 내가 누구인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어영부영 나이만 처먹었다. 동성애자이면서 제대로 동성애를 하지도 못했고 그것도 모자라 이성애자들로부터 마이크 하나조차 제대로 훔치지 못했다. 이토록 철저한 실패는 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우리는 망했다. 망해먹은 채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우리는 웃고 떠들고 술 먹고 섹스하다 죽을 줄이나 아는 동성애자들일 뿐, 그 이상의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마지막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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