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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코는 왜 Mar 28. 2019

은유와 위트로 기워낸
그의 몽타주

#브런치 무비 패스 / 영화 <바이스>

*스포일러가 있지만 괜찮습니다. 어차피 스포일러를 봐도 영화를 보지 않는 이상 이해가 안 됩니다.


최근 정주행하고 있는 드라마가 하나 생겼다. <하우스 오브 카드>, 이미 너무 유명한 미드라 굳이 설명 안 해도 되겠지만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미국의 정치권에서 권력을 갖기 위해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을 프랜시스와 클레어라는 주인공을 통해 보는 드라마다. 때문에 여기서 살인이 일어나든 직장을 잃든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보면 된다. 하지만 그걸 본 뒤에 찾아오는 찜찜함은 드라마가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식할 때마다 문득문득 찾아온다.


그런데 최근에 본 영화 <바이스>, 소재도 내용도 그 찜찜함도 비슷했다. 다른 게 있다면 소재를 그려낸 방식과 드라마와 달리 영화는 실화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실화, 미국 정치, 실세' 따위의 단어들을 생각하면 다들 생각나는 이야기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전형적이고 보장된 상업 영화, 스릴러와 액션을 살짝 가미한 영화의 전형을 상상하고 이 영화를 본다면 분명 그런 생각을 한 게 우스워질 거다. <바이스>는 실화에 기반한 영화지만 실화이길 거부하는 몸부림이 꽤나 쏠쏠한 재미를 준다. 하지만 실화이길 거부하는 몸짓은 오히려 영화가 사실에 기반한 것임을 자꾸만 상기시켜줘 아직까지 살아있는 '딕 체니'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게 한다.


발정 난 소년의 일기


심플한 바이스의 포스터, 여기서 알아챘어야 했다


영화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조금 자극적 일지 모르지만 앞부분을 나는 저렇게 표현하고 싶다. '발정 난 소년의 일기', 무책임하고 당장의 눈앞에 것에 집중하고 그렇기에 세부적인 것보단 큰 형태의 목표만을 그려내는 소년의 포부가 적힌 일기 말이다. 영화는 그것에 맞게 통통 튄다. 연대기를 가볍게 툭툭 쳐내려 가면서 굉장히 심플하고 가벼운 연출을 보여준다. 정제되지 않은 언어, 깊지 않은 내용, 산만한 연출로 주인공 '딕 체니'의 젊은 날을 그려낸다.


사실 이 부분은 별로 설명할 게 없다. 나는 너무나 많은 양의 정보를 짧은 시간에 받아들이려다 어느 순간부턴 포기해버렸다. 반쯤 포기하고 영화를 볼 때쯤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식의 동화처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관객을 전부 완전히 속인 감독의 의도에 어이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화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은유와 위트로 기워낸 범인의 몽타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이후에 나오는 영상을 우리는 보통 쿠키 영상이라고 한다. 감독은 영화의 뒷부분, 사실상 가장 중요한 부분을 쿠키 영상으로 다룬다. 쿠키 영상으로 다루는 것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 가장 큰 의미는 사실 관계에 대한 회피다. 첫 번째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이후의 영상은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의 성격을 가진다. 미국 역사상 가장 비밀스러운 권력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은 것이 더 많다. 때문에 그 뒷이야기를 쿠키 영상으로 만듦으로써 그것을 다루는 것에 대한 책임을 어느 정도 회피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영화의 이야기가 자주 내레이션으로 '설명'되는 것도 이런 점과 맞물린다.


첫 번째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실 관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면 그것을 자유롭게 변주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것을 최대로 활용한다. 그렇다고 촌스럽게 분위기 잡고 중후한 목소리로 하는 게 아니라 적절한 은유와 위트를 곁들인다. 예를 들어 아들 '부시'가 '딕 체니'를 자신의 농장으로 초대해 러닝메이트를 제안했을 때 딕 체니가 제안한 내용은 잘 만든 위트, 펀(Fun)의 전형을 보여준다. 절대로 웃긴 말을 내뱉는 당사자들은 웃지 않는다. 하지만 같이 진지해지기엔 그 내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저절로 웃음이 나는 식이다.


이외에도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려 정부 관계자들이 회의하는 모습을 레스토랑에서 코스 요리를 주문하는 모습에 빗댄 것, 간혹 자료 영상처럼 야생 동물 영상이 적절하게 배치되는 것 등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은유는 어떤 대상을 빗대어 표현하기에 그것의 본질을 감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는 오히려 반대다. 은밀한 권력에 대한 상상, 그것을 자극시켜 영화에서 직접 보여주지 않은 부분들까지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은유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고 감독은 적절한 곳에 은유를 배치해 영화를 지루할 틈 없이 끌고 간다.


이런 점들을 활용해 제작진들은 마치 범인을 잡아가는 형사처럼 범인의 얼굴, 딕 체니의 얼굴 조각을 하나씩 맞춰나간다. 일련의 사건들, 그의 생애와 말, 주변 인물들을 기워내 만든 범인의 몽타주. <바이스>는 딕 체니의 몽타주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절로 생각난다. 멀리서 보면 딕 체니의 얼굴, 가까이서 보면 그의 삶이 보이는 영화는 분명 매력적이다.


그래서 끝이 뭔데?



그럼에도 영화가 끝으로 가면 이런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나쁜 일 했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뭐? 하는 의문들. 실화 영화, 그것도 당사자가 아직까지 살아있는 영화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문제점이 하나 있는데 그건 끝이 흐지부지하다는 거다. 가장 손쉬운 마무리는 열린 결말로 결말에 대한 책임을 관객에게 떠넘기는 것인데 <바이스>는 그 흐름을 따라간다. 마지막 딕 체니의 독백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영화 속 딕 체니는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많은 부분들이 잘려나가긴 했지만 마치 히어로 없는 영화의 매력 있는 악당 같다. 그렇기에 그를 비판하기 위함이 분명한 노골적인 자막들과 결말에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악당을 본인들 손으로 끝내는 모습은 별로 멋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로 아쉬운 게 있는 영화였지만 분명 재밌다는 걸 부정하진 못하겠다. 다만 가능하다면 딕 체니에 대해 조금 알고 가길 바란다. 순간순간 지나가는 역사적 사실들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알려줄 만큼 영화는 친절하지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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