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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코는 왜 Apr 04. 2019

p.s. 나의 작은 시인에게

#브런치 무비 패스, <나의 작은 시인에게>


시?


<나의 작은 시인에게>

'시'를 정의하는 건 어렵지만 나는 나름의 시론을 가지고 있다. 가장 보편적인 정의로 시는 '세계의 주체화'다. 이 어려운 말을 쉽게 풀어내 보자. '세계의 주체화'라는 말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내 안으로 끌고 들어와 나름대로 해석해내는 것이 시라는 말이다. 더 간단하게 하면 내 맘대로 하는 쓰는 게 시다. 나도 여기에 동의한다.


이런 정의에서 더 나아가 좋은 시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가면 그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나름의 정의는 내 안으로 끌어들인 세계의 모습이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어낼 때, 즉 보편성을 지닐 때 그건 좋은 시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보편성이라는 말을 '뻔하다'라는 말과 혼동하면 안 되는데 보편성을 지닌다는 것은 나의 독창적인 세계가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는 말이다. 내 세계가 다른 사람들에게 닿았을 때 다양한 의미로 분화되는 것, 그런 가능성이 열린 세계가 좋은 시 속에는 존재한다.


영화 속에서 '애나는 아름답다'라는 문장에서 '애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라고 말하는 어린 지미의 모습은 이런 점을 관통한다.


빛나는 시적 재능, 대화가 필요해


애나는 아름답다

5살 '지미'는 시가 뭔지 모른다. 그저 느낌을 말할 뿐이다. 그것을 '시'라고 정의해준 건 선생님 인 '리사'다. 시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대상을 필요로 한다. 내가 꽃이라고 불러줘야 비로소 꽃이 되는 것처럼 '중얼거림'을 '시'라고 불러준 리사의 등장은 지미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물론 어린 지미는 큰 이후에야 그 의미를 알게 될 테지만.


애나는 아름답다
나에게는 충분히 아름답다
태양이 그녀의 노란색 집을 두드린다
마치 신이 보낸 신호처럼


영화는 그런 지미의 시적 재능을 살리고자 한 리사의 노력이 주된 내용이다. 물론 지미의 시적 재능이 발현된 작품들을 보는 맛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건 그것을 위해 자꾸만 지미와 대화하는 리사의 모습이다. 지미의 시를 기록하고 관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시 낭송회에 데려가고 심지어는 납치까지. 분명 과격한 모습이 쇼타 콤플렉스처럼 비칠 수 있으나 그런 의심은 지미를 데리고 캐나다 인근 호수에 갔을 때 없어진다.


물속에서 지미와 같이 헤엄치는 리사의 모습은 영화 '문라이트'를 떠올리게 한다. 어린 샤이론과 후안의 정신적 교감이 물에서 이뤄진 것처럼 리사는 물에서 지미와의 정신적 교감을 시도한다. 리사에게 지미는 자신에게 없는 시적 재능을 발현시켜주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착에 가까운 그 시도는 실패한다. 물에서 리사를 통해 이뤄졌어야 할 지미의 성장이 물 밖을 나온 후 지미의 입을 통해 스스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직접 자신의 성장을 말하는 지미와 그것을 받아 적는 리사의 모습은 비극적으로 끝날 두 사람의 관계를 예고한다.


예술가가 아닌, 그렇다고 뮤즈도 아닌


리사와 지미

리사는 왜 그렇게 지미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리사가 지미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사실 지미의 시적 재능보다도 중요한 영화의 주제다. 그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지미가 아닌 리사의 시선을 따라간다. 리사는 재능 없는 예술가다. 시 수업에서 시 속에 자신을 투영하지 못한다고 비판받고, 공식 같은 비유를 쓰는 재능 없는 시인이다. 그런 점에서 리사는 자신이 원하는 예술가가 되지 못했다. 더 나아가 지미의 시를 훔쳐 자신의 시인 것처럼 발표한 도둑이다. 하지만 리사는 예술가가 되지 못한 상황을 지미의 뮤즈가 됨으로써 극복하려 한다.


자신이 들었던 시에 대한 지식을 지미에게 말해주고 주변과 차단시키고 설득한다. 지미가 자신에게 재능이 있음을 인식했을 때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라면서, 그리고 자신을 시의 소재로 삼아주길 바란다. 즉, 유명한 예술가들의 뮤즈처럼 지미의 시적 영감이 되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데려간 시 낭송회에서 '애나'의 주인공이 유치원 보조교사임을 알 게 됐을 때 그 바람마저 무너진다. 이후 그녀는 지미를 주변과 차단시키는 것으로도 모자라 세상과 단절시키려 한다.


일방적인 소통은 시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시인도 뮤즈도 되지 못한 그녀의 극단적인 선택은 위에서 밝혔듯이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모든 교감에 실패한 리사의 선택은 결국 지미를 세상으로 놓아준다. 지미의 신고 후, 리사는 납치범이 되고 지미는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간다.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듣지 않는 예술의 의미


리사

영화는 지미가 탄 경찰차 문이 닫히고 '시가 떠올랐어요'라는 지미의 외침이 아무에게도 닿지 않은 채 끝난다. 물에서 나와 성장한 지미의 손에 의해 끊겨버린 리사와의 관계, 이제 지미의 시를 기록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듣지 않는 예술도 의미가 있을까? 지미는 이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간다. 다시금 '시'가 '중얼거림'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영화는 그것을 단정하듯 여운을 남기지 않는다.


애나, 일어나 기억해 주렴
외로움 또한 세상과 보내는 시간이라는 걸
모두가 함께 자리한 방에
죽은 친구들의 영혼이 스쳐가네
바람에 울리는 풍경 소리처럼
두려워하지 마 애나
이 길의 끝이 멀게만 느껴져도
어느새 성큼 우리 뒤에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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