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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코는 왜 Apr 05. 2019

가장 완벽한 저녁을 보내는 방법

호텔 이매지너리, <코펜하겐 해석>

*호텔 이매지너리에서 관람 가능한 <코펜하겐 해석>, 3월 10일부터 5월 31일까지 전시가 진행됩니다.


성북동 구석에서 진행되는 은밀한 전시, 4명이 모두 체크인하면 전시가 시작됩니다. 늦지 않게 착석해주세요. 따듯한 홍차와 러스크가 준비돼 있습니다. 머리가 아플 수 있으니 당을 충분히 섭취하시기 바랍니다. 


한 편의 연극 같은 전시, 주인공은 없다


어서 오세요 호텔 이매지너리에

호텔이라는 이름에 의심을 품으며 골목길에 들어선다. 가파른 오르막을 걸어 올라간다. 안쪽까지 몸을 기울이지 않는 이상 드러나지 않는 그곳에서 홍차를 우리며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 날이 흐렸다. 비와 눈과 우박이 번갈아 가며 내렸고 바람에 날려간 우산들이 호텔을 찾아가는 내내 길거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도착한 곳은 당연하게도 호텔이 아니었다. 서울의 많은 달동네 중에서도 유난히 복잡해 보이는 성북동 골목길, 그곳에서 진행된 전시는 마치 한 편의 연극 같았다. 셰익스피어? 아니면 소년탐정 김전일이거나.


모두가 주인공인 것도 그렇다고 모두 관객인 것도 아닌 이 연극은 한 편의 소설에서 시작된다. 헤밍웨이의 <인디언 캠프(Indian Camp), 1925>, 헤밍웨이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생소한 작품을 낭독하는 기획자, 즉 이 연극의 감독은 능숙한 솜씨로 4명의 배우를 이끈다. 독백 같은 낭독이 끝난 후 감독의 질문은 간단했고 대답은 각자 나름이었다. 주로 느낌에 관한 것들, 하드보일드 문체로 잘 알려진 헤밍웨이의 무미건조하고 불친절한 소설을 두고 더욱 불친절한 질문을 던진다. '이 인디언은 왜 자살했을까',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인물은 누구인가요' 등등.


2시간가량,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전시된 작품은 한 편도 보지 않은 채 모두 그 소설에 몰두한다. 감독의 질문을 따라 배우는 각자의 해석을 연기하고 또 다른 배우의 연기를 지켜본다. 혹 그런 경우도 있다. 한 배우가 다른 배우에게 질문은 던지는 경우, 하지만 그건 드물다. 그걸 기대하기엔 우린 지금까지 너무 개인적이지 않았나. 그러다 연극이 막바지로 흐를 때쯤이면 잊고 있던 생각이 문득 든다. 그래서 왜 '코펜하겐 해석'인가. 왜 '헤밍웨이'인가.


문·이과의 대통합을 꿈꾸다


꼭 모든 게 의미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인터미션, 밤이 깊었다. 주택가의 불은 유난히 빨리 꺼졌다. 낙산공원을 중심으로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나를 제외한 3명이 뿜는 담배 연기는 유난히 잘 보였다. 나는 담배 연기와 가장 닮아 있는 입김을 내뱉었다. 찬 바람으로 가득 찬 폐의 아찔함과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러야 하는 두통은 그동안 잊고 지내던 것들이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코펜하겐 해석,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확률.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확률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은 관찰자의 시점이 위치하는 곳에서 확률이 결정된다. 그렇기에 모든 관찰자, 모든 순간마다 관찰하는 결괏값이 달라지고 그것으로 인해 나타나는 불확정성까지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것이 코펜하겐 해석의 요지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을 대화, 커뮤니케이션으로 이어 오면 상대방의 말투, 억양, 표정, 제스처 등은 어떤 사람이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그건 시간과 장소, 날짜와 그날 먹었던 음식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는데 그걸 이해해보자는 것이다. 서로 간의 소통을 통해서, 의견의 대립을 통해서 그것을 생각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점까지 밀고 나가는 게 이 전시의 목적이 된다.


헤밍웨이의 단편은 이 과정을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작품이었다.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무미건조한 소설 속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는 과정, 설사 그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느껴질지라도 그것도 그것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최종적으로 그것이 됐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작품을 관람할 자격을 부여받는다. 


남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에 대한 한계


김남훈, <Maybe that's nothing special>, 2012

언젠가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은 어떻게 이뤄지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해'는 크게 두 가지 과정을 거친다. 먼저,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보낸 언어적, 비언어적 의미를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나의 상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상상 속에서 상대방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에 무리가 없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한다(Understanding)'고 표현한다. 이 과정은 분명한 한계가 있지만 다른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남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말은 무책임한 말이 되고 더욱더 남을 이해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 된다. 결국 나의 상상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전시는 그런 점들을 의식하고 있다. 가능성을 열어두고 최소한의 안내만 한다. 그중 특히 주목할만한 작품은 김남훈 작가의 <Maybe that's nothing special>이다. 이탈리아에서 촬영한 10분가량의 영상물로 여러 군데를 다니며 잡초에 물을 주는 게 전부인 작품이다. 잡초에 물을 주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계속 보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주목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찰이 느껴진다. 


사람에 비해 잡초의 목표는 분명하다. 살아남아 씨앗을 뿌리는 것이 잡초의 가장 큰 목표일 텐데 작가는 그 과정에 관여함으로써 그것이 목표를 보다 수월하게 이룰 수 있도록 돕는다. 촉촉해진 잡초, 넘쳐흐르는 물이 담긴 영상을 보면 남는 것은 결국 삶에 대한 경외다.(혹은 간섭이다.) 전시를 관람하기 이전에 긴 시간 동안 논의해 온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 그것은 결국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존중의 의미이기도 하다.(혹은 연민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그런 점을 관통한다. 그리고 나를 다시 성북동 골목 저 아래로 이끈다. 배웅한다.


집으로 곧장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이 두통을 깨버리기에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술을 마셨다. 내가 나를 이해하기조차 어렵다는데 나는 남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2시간, 3시간 이 단편적인 경험은 누군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걸까? 아니면 오히려 남에 대한 불신만을 남기는 걸까. 그 답을 찾을 수 없어 술을 마셨다. 새벽 5시, 아직 밤은 어두웠다. 집에 누워 창문을 보며 생각한다. 그게 뭐였는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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