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화미술관, <팬텀 시티 Phantom City>
*<팬텀 시티 Phantom City> 전시 중 최은정 작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서술한 글입니다.
서울 야경은 나의 동경이었다.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가 생각난다. 하루를 마친 뒤 버스를 타고 건넌 양화대교, 나란히 서 있는 한강 다리마다 차들이 한가득이었고 그것들이 내는 불빛은 커다란 날개를 가진 나방 같았다. 마치 하나의 유기체인 듯 굳건하게 서 있는 그 다리들을 매일 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십 번도 더 했다. 그리고 나는 꼭 그 불빛에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는 듯 기꺼이 불나방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도시를 밝히는 불나방들의 행진
생각해보면 내가 여행했던 모든 도시마다 내로라하는 야경은 하나씩 있었다. 그리고 오히려 사람들은 낮보다 야경이 빛나는 밤에 더 활발했다. 사람들이 활발해서 도시가 밝은지 도시가 밝아서 사람들이 활발한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 둘은 공존하고 있었다.
도시를 여행하면서 나는 항상 의문이 들었다. 과연 도시가 먼저일까, 사람이 먼저일까. 도시는 많은 사람이 모여서 형성됐다는 점에서 '개인의 집합'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론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도시의 요건을 충족했다는 정량적 기준 이외에도 커다란 건물, 그리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 간의 관계,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경제 발전과 시민의식의 성숙 등 물질적인 발전과 정신적인 성장까지 동시에 이루어지는 기묘한 공간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렇게 형성된 도시엔 크게 두 가지의 모습이 있다. 낮과 밤. 그것을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는 없으나 대략 인공적인 불빛이 햇빛을 대신하는 순간부터 밤이라고 본다면 도시라는 공간, 그리고 그 속에서 사는 구성원들은 굉장히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에게서 나오는 순리를 스스로 부정하면서 발전해가기 때문이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는 단순한 자연의 원리가 아니라 스스로 빛을 선택하고 만들어내고 통제하는 주관적인 원리를 도시의 구성원들은 선택한 것이다. 빛을 언제나 갈구하는 것, 나는 이걸 욕망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욕망의 산물이 모인 곳이 바로 도시다.
그렇기에 과연 그곳에서 내뿜어지는 인공적인 불빛의 집합체, 야경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고민은 결국 야경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구성원에 대한 생각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전시는 이 지점부터 시작된다.
도시의 야경이란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 그것을 바라는 꿈,
희망이 가시화되어 나타난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도시의 야경은 욕망으로 가득해 보이지만,
한편으론 희망으로 가득해 보여서
애매하고 아이러니한 분위기를 풍기게 되는
도시의 숨결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꺼지지 않는 불빛, 욕망과 열정으로 가득 찬 현대 사회에 대한 희망
작가에게 야경은 현대사회의 욕망과 희망 중심으로 한 여러 생각이 한데 엮인 커다란 사회적 담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런 담론이 형성되는 과정이 두 가지로 진행된다. 하나는 사회 전체적으로 형성되는 커다란 의미의 담론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변화나 행동에 의해서 형성되는 담론이다. 이를 증명하듯 작품에서는 커다란 사각형을 중심으로 건물의 뼈대 같은 것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불규칙하고 자유로운 형상들이 지나다닌다. 사각형을 중심으로 한 뼈대들이 도시의 담론이라고 한다면, 그 사이사이 배치된 불규칙하고 자유로운 형상들은 개인의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야경을 담론의 하나로 바라본다는 것은 그것을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럼 야경이라는 담론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도시의 밀집성으로 인해 개인이 포화상태가 됐다는 것이다. 포화상태에 개인은 분출구를 찾기 마련이다. 만약 그것이 자아실현이라면 그것을 발현할 공간과 대상이 필요한데 도시는 개인을 거대한 담론, 집단의 합리성과 이성이라는 거대한 담론 속으로 묶어버린다. 그리고 한편으로 개인은 도시의 집단적 합리성과 이성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야경은 그 지점에서 탄생한다. 모두가 깨어 있는 낮에는 할 수 없던 것들도 밤에는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면 이해가 쉬울지 모르겠다. 그렇기에 작가에게 야경은 도시의 구성원들이 내뿜는 생각들, 자아실현 욕구들이 모여 만들어진 하나의 사회적 담론인 것이다.
결국 야경을 만들어내는 것은 개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시라는 커다란 집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자 하는 노력이 역설적이게도 도시를 숨 쉬게 하는 힘이 된다. 둘의 담론은 끊임없이 부딪히지만, 변증법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야경 속에서 사람들과 도시가 공존하는 것 같다고 한 나의 감상은 아마 도시와 구성원의 이런 관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최근의 사회적 담론을 끌어오자면, 전후 세대에게는 희망이 있었다고 한다. 무너진 도시를 세우고 내 손으로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 지금까지 밝혀온 논의에 따르면 우리의 야경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희망이 없는 시대라곤 하지만 오히려 나는 야경 없는 세계가 걱정된다. 작품처럼 화려한 개성들이 부딪히고 섞이는 과정을 거친 뒤 결국 야경이 없어지는 날이 온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