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 되면 우리 아이들이 시드니 학교생활을 시작한 지 꼭 1년이 된다. 시간이 참 빨리 지나간 것 같다. 하루 종일 못 알아듣는 영어를 듣고 있는 게 힘들다고 하던 작은아이도 이제 그다지 힘들어하지 않는 것 같다. 이제는 가족들과 대화할 때도 영어단어를 어찌나 섞어 쓰는지. 그리고 친구들과 노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제법 순발력 있게 대화도 잘하는 것 같아 1년이 되어도 영어가 안 나오는 엄마로서는 부럽기까지 하다. 하루는 작은아이가 신발끈이 풀려서 선생님께 묶어달라고 했다고 하는데 순간 ‘신발끈이 영어로 뭐지, 신발끈을 묶다는 뭐지’하고 내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께 뭐라고 얘기했는데?”, “Could you help this?라고 했는데.” 아. 나는 도대체 십여 년을 어떻게 영어 공부를 한 것인가.
우리 작은아이는 이제 친한 친구들도 생겼다. 엄마로서 걱정은 그 아이들이 모두 여자 친구들이란 점이다. 남자 친구들하고도 놀아보라고 하지만 아들은 남자 친구들은 항상 축구를 하는데 자신은 축구하기가 싫어서 못 놀겠다고 한다. 담임 선생님과 인터뷰에서도 선생님의 첫마디가 친구들과 잘 지낸다며 여자아이들 이름을 말하길래 남자아이들과도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은 그게 왜 문제가 되냐고 오히려 반문하셨다. 선생님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 아들은 너무 safety한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남자 친구들이 거칠게 노는 곳에 끼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며 이것이 문제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우리 아들은 영어를 못하기도 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하여 한동안 학교에서 말을 안 하고 지냈기에 아무래도 다정하고 친절한 여자 친구들이 먼저 다가와서 챙겨주고 돌봐주었던 것 같다.
다만 조금 나의 마음에 걸리는 점은 아무래도 호주의 성정체성에 대한 개방적 성향 때문인 것 같다. 처음 우리 아들이 전학 왔을 때 먼저 다가와서 살뜰히 돌봐주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생김새가 정말 톰크루즈의 딸 수리처럼 생긴 인형 같은 아이였다. 그 아이 엄마가 반대표이기도 하였고 그 아이 언니는 우리 큰애랑 같은 반 친구이기도 하여 이래저래 도움도 많이 받고 참 고마웠다. 그런데 이 자매는 엄마가 2명이다. 우리는 대개 엄마가 2명이라고 하면 당연히 부모님이 이혼하고 재혼하셨구나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건 아니고 아빠가 뒤늦게 본인의 성정체성을 깨닫고 엄마가 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사정은 모르지만 아빠가 둘인 아이도 있다. 큰아이 또한 학교에서 동성연애에 관한 책을 접하여 부랴부랴 큰 아이와도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나와 다른 사람들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잘못됐다고 하면 안되며 서로를 있는 그대로 모습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사실 나 역시 아이 친구의 또 한 명의 엄마를 학교에서 볼 때마다 순간 놀라는데 아이와 이런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어서 나름 많이 고민하며 대화하였다.
이 이외에도 큰아이는 반 친구들이 ‘너는 엄마와 사니, 아빠와 사니?’라고 물어봐서 엄마, 아빠와 같이 산다고 얘기하니 친구들이 놀라며 진짜 엄마 아빠와 같이 사는 거냐고도 물어봤다고 한다. 부모님이 이혼한 친구가 반이상은 되는 것 같다고 하길래 내가 무심코 “이 나라는 살다가 사랑하지 않으면 쿨하게 헤어지는 거야”라고 했더니 아이가 좀 놀란 것 같았다. “엄마, 아빠와 같이 살아줘서 고마워.”라고 하면서. 그리고 학교에서 자신은 입양아라고 당당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친구들도 있다고 하니 이곳 호주에서 아이들은 여러 인종, 국적, 문화, 가치관을 가지고 다양한 형태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접하며 인간관계의 이해도 훨씬 성숙해지는 것 같다.
여하튼 지금 우리 아들은 학교가 끝나면 거의 매일 학교 뒷동산에서 친구들과 함께 놀이터에서도 놀고 공놀이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며 아주 신나게 놀고 있다. 국적도 인종도 다양한 학교이다 보니 친구들의 출신은 러시아, 중국, 베트남, 뉴질랜드 등 다양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친구들의 엄마와 같이 앉아있어야 하는 나는 강제 영어학습 중이다. 그런데 왜 영어는 전혀 진전이 없는 것일까. 슬프지만 이제 같이 있으면서 대화에는 가끔만 참여하며 듣고만 있는 것도 꽤 익숙해졌다.
개학하고 며칠 후, 작은아이가 학교에서 단어 레벨을 다시 나눴는데 자기가 속한 레벨에는 이제 3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여 당황하였다. 2학년은 단어 스펠링 수준을 3개의 반으로 나누어 가르치는데 그 주에 배운 열댓 개의 단어를 금요일마다 시험을 본다. 물론 우리 작은아이는 가장 하위 레벨반이다. 매주 시험을 보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아이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 그냥 하는 데로 두었는데 반 친구들 모두 레벨 업하고 3명밖에 없다고 하니 내가 너무 관심을 안 가져줬나 싶기도 하고 선생님께 민폐인가 싶기도 하였다.
“엄마, 최고 레벨 반에 있다가 중간반으로 떨어진 친구도 있는데 몹시 당황한 것처럼 보였어. 그런데 나는 더 떨어질 반은 없으니까 그럴 걱정은 없잖아?” 하며 해맑은 우리 작은아이이다.
“아니야, 이대로는 안돼, 이번 텀의 목표는 한 단계 레벨업이야!”
“그런데 내가 레벨업하면 같이 있는 카트리나가 외로울 텐데.”
“안돼, 그런 의리는 지금 생각하지 마!”
그리하여 우리는 매일 단어를 두 번씩 쓰며 외웠다. 이번 주 단어 중 외우기 어려운 것은 Monday부터 Friday였다. 나와 작은아이가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큰아이가 보더니 엄마가 애를 너무 못 가르치는 것 같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 네가 한번 해볼래? 네 동생 백점 받으면 엄마가 5달러 줄게.” “진짜지?” 갑자기 아이들 눈이 반짝하더니 둘이 방으로 뛰어 들어간다. 곧 요일을 다 외워서 나오는데 희망이 보였다. 큰아이는 5달러 받으면 2달러 주겠다며 동생을 꼬여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외우게 만든 것이다.
시험 전날 작은 아이는 꼭 백점 받겠다면서 단어를 세 번이나 써보았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하는데 그동안 엄마가 너무 무심했구나 싶어 반성하였다. 오늘 아침 작은아이는 선생님이 깜짝 놀랄 텐데 어쩌지 하면서 새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계속 헤죽헤죽 웃으며 등교하였다.
2학년 가장 하위 레벨반의 단어 수준
그리고 그날 오후, 학교를 마치고 뭔가 샐쭉한 표정으로 나오길래 백점을 못 받았구나 싶었다. 그런데 백점은 받았는데 카트리나도 같이 백점을 받았다고 한다. 하마터면 자기만 남을 뻔했다는 것이다. 역시 카트리나 엄마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단어 공부시켰나 보다. 그리고 우리 작은 아이는 기특하게도 오늘도 열심히 단어를 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