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아침은 늘 정신없었다. 아직 눈도 제대로 못 뜬 아이들을 앉혀놓고 입에 밥을 한 수저 떠서 넣어주고 출근 준비하다가 아이들 손에 칫솔 쥐어주고 출근 준비하다가 눈에 보이는 어질러진 집안 치우다가 뭔가 한 가지 빠뜨린 것 같은 느낌을 애써 지우며 큰아이는 학교 교문에 작은 아이는 어린이집에 밀어 넣고 회사로 뛰어간다. 자리에 도착해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누르고 부팅될 동안 탕비실에서 노란 커피 한 봉지를 타 와서 한숨 돌린다. 왜 사무실에는 항상 노란 봉지 커피만 있는 것일까 하면서도 바로 이 시간만 되면 무슨 신성한 의례를 거행하는 것 마냥 이 노란 봉지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다음 절차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잠깐의 시간 동안 커피를 마시며 정신을 차리고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업무 모드로 들어가는 것이다.
학생일 때 내가 상상하던 미래의 나의 모습은 아침마다 멋진 정장을 차려입고 빌딩 로비에 있는 커피전문점에서 커피를 사서 손에 쥐고 역시 그 빌딩에 있는 사무실로 여유 있게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나의 첫 사무실은 빌딩도 아니었고 근처엔 카페도 식당도 없었으며 아침의 여유는 가질 수 없는 사치였다. 그리고 내가 사회초년생이던 2008년 금융위기 때 우리 회사 근처에 있던 노란 커피 회사가 공장 증축하는 것도 보았다. 그 당시 서민들이 힘들면 노란 커피를 더 마시는 건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단지 나의 생각, 근거는 없다) 사무실 근처에 커피전문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였고 점심시간에 직장동료들과 구내식당 점심값보다 비싼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것은 즐거움이었다.
호주에 와서 이제 주변에 널려있던 노란 커피도 없고 직장생활도 안 하니 커피를 끊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지금 속이 불편한 날에도 커피를 마시고 있다. 호주 커피에 중독되었다. 호주에서 마시는 커피는 한국에서와 뭔가 다르다. 커피 자체가 다른 건지, 물이 달라서인지, 우유맛이 더 진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내 마음의 여유 때문인지 어쨌든 참 맛있다.
처음 시드니에 와서 아이들을 시티에 있는 어학원에 한 달 정도 보냈었다. 아이들이 어학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는 어학원 앞에 있는 카페에서 라테를 사서 들고 시티 구경을 하거나 근처에 있는 도서관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때 카페 직원이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이름은 왜? 손님이 많아서 커피가 잘못 전달될까 봐 그런가 생각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카페에 들어서자 카페 직원은 내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네고 내가 마셨던 설탕 한 스푼 넣은 라테를 알아서 챙겨주는데 낯선 도시에 와서 이런 경험을 하니 좀 감동스러웠다.
시드니에서 만난 나의 첫 카페
이 이야기를 남편에게 말하자 남편은 자기 회사 로비에 있는 카페는 점심식사 후 직원 세 명이 사무실로 들어갈 때 멀리서 그들이 걸어오는 것만 보고 각자의 커피를 준비해서 바로 건네준다고 한다. 카페에 안 들르고 사무실로 바로 올라가면 어쩌려고? 하지만 반대로 이런 경험을 한 번 겪고 나면 절대로 카페를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늘 라테를 마셨지만 어느 날은 갑자기 아이스라테가 마시고 싶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카페에서 단골손님을 기억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싶다. 우리가 단골 식당에 가면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주듯이 말이다. 황량한 회사 건물 앞에 처음 동네 카페가 생겼을 때 동료들과 신나서 그 카페를 가곤 했다. 물론 카페 언니도 얼마 안 가 당연히 우리를 기억했었다. 그러나 동네 카페는 오래 영업하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다. 한국에서는 우후죽순 생기는 커피전문점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이 더 익숙해지고 있고 당연히 “늘 마시는 커피 드려요?”하고 반갑게 맞이하는 경우는 이제 거의 없을 듯하다. 그러나 호주는 동네 카페의 세상이다. 호주에서는 별다방은 정말 보기 힘들지만 자그맣고 아늑한 카페들이 곳곳에 널려있다. 그리고 이 작은 카페들마다 커피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걸 보면 호주 사람들의 커피 사랑은 한국 못지않은 듯하다.
비 오는 날에는 쇼핑몰 내 카페에서
지금은 출근을 안 하는데도 여전히 아침에 정신이 없다. 아이들의 도시락과 간식을 챙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들어가지 전에 카페에 앉아 한숨 돌리며 한 시간 정도 책도 보고 라디오 방송도 듣곤 한다. 물론 요즘 내가 제일 자주 가는 집 앞 카페에서는 이제 더 이상 영어도 필요 없다. 그냥 알아서 설탕 한 스푼 넣은 라테를 챙겨주시고 나는 그저 “땡큐”란 영어밖에 쓸 일이 없다. 비가 오는 날은 특별히 비 오는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카페에 앉아있기도 한다. 이 카페는 해가 뜬 날은 눈부셔서 아침에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이런 시간은 직장생활을 할 때 나의 소원 중 하나였다. 소원 한 가지가 이루어졌고 나는 지금 커피 중독이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면 다른 건 몰라도 호주의 파란 하늘과 예쁜 카페와 커피가, 그리고 이런 여유가 많이 그리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