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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 Feb 20. 2021

#23 2021 Term 1 새해의 시작

 새 학년이 시작되고 큰아이 하이스쿨 같은 학년 학부모들과의 저녁 식사 만남의 시간이 있었다. 작년 한 해 코비드 팬데믹으로 인하여 교류와 소통이 없었다며 학교 측에서 학부모 만남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코비드 제한 조치에 맞춰 50명이 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참석할 학부모는 개별적으로 모임 장소에 사전 예약하는 방식으로 인원을 조정하여 두어 차례에 나눠 모임을 가졌다.


 진심으로 가고 싶지 않았으나 아이를 생각하여 부모로서 적극적으로 모범을 보여야겠다는 마음다짐을 하며 모임 장소로 향하였다. 모임 장소는 호주에 많이 있는 작은 규모의 호텔에 있는 펍 같은 곳으로 호주 현지인들은 저녁에 이런 시끄러운 펍에서 술 한잔 시켜놓고 모임을 많이 갖는 것 같다. 호주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지역 감염의 집단 발병이 많이 발생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학부모 모임 초대장

 모임 장소에 도착하여 아이와 나의 이름이 적힌 명찰을 가슴에 달고 분위기를 살펴본다. 먼저 온 부모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어딘가에 끼어야 할 텐데 하는 압박감이 나를 짓누른다. 마치 우리네 회식할 때 한 손에는 술잔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젓가락 들고 자리 옮겨 다니며 이야기 나누듯이 이곳에서는 한 손에 와인잔들고 다른 한 손에 피자 한 조각 들고 옮겨 다니며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용감하게 끼어들어 일단 인사를 한다. 그리고 영어를 못하는 나에게는 나름의 조악한 생존 대화 전략이 있는데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어메이징!, 판타스틱!, 뷰티플!, 원더풀!” 등의 단어를 돌려가며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 온 부모들도 서로의 공통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다.

 “너희 딸은 스포츠 뭐하니?”

 “우리 딸은 럭비를 해.”

 “와우 판타스틱!”  이렇게 대화는 나의 전략대로 시작된다. 그러나 나의 영어는 금방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사실 나 영어를 잘 못해서 다 이해하지 못하겠어.”

 “나는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는데 영어를 하고 있는 넌 정말 대단한 거야.”

 “우리 딸이 케이팝 보이들을 너무 좋아하는데 그 애들이 영어로 랩하면 난 영어인데도 못 알아들어.”

어쨌든 엄마들의 배려에 힘입어 진땀 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두 시간쯤 자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 패잔병처럼 구석에 있는 소파로 도망가 있었다. 딸아, 엄마는 최선을 다했어.   

  

 이 모임을 계기로 작은 아이 학교 근처에 있는 앵글리칸 교회에서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무료 영어 수업을 다시 열심히 참석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작년 한 해 코비디로 인하여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이번 학기부터 다시 대면 수업이 시작되었다.      


 하이스쿨에서 영어 선생님을 하시다 은퇴하신 제인 선생님이 수업을 진행하시고 봉사활동 삼아 나오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수업을 도와주신다. 주로 호주의 문화나 기념일과 관련된 내용의 지문을 읽고 대화를 나누고, 짧은 소설을 읽기도 하고, 성경 이야기도 한다. 특히 제인 선생님의 성경 이야기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듯이 엄청 재미있는데 특히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야곱, 형에서, 아버지, 어머니의 1인 4역을 실감 나게 연기하셔서 이야기 속으로 마구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인기 있는 영어 선생님이셨으리라. 그리고 여기 계신 봉사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학생들과 같이 문제도 풀어주고 대화도 나눠주는데 이 또한 영어 말하기에 매우 도움이 된다.     

 이 영어 수업에 꾸준히 참석하는 학생은 대체로 외국에서 온 할머니들이나 나처럼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오는 엄마들이다. 오랜만에 다시 오픈하여 그런지 학생 수는 많이 줄어서 오늘은 러시아 할머니 세 분과 스페인 엄마, 브라질 엄마, 중국 엄마, 그리고 나를 포함해 한국 엄마 두 명뿐이었다. 그리고 제인 선생님은 대상포진에 걸려서 오시지 못하여 봉사자 할머니들이 서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하셨다.


 내게는 생소한 ‘팬케이크 데이’가 오늘의 주제였는데 직접 전기팬과 각종 주방도구들, 팬케이크 재료를 모두 가져오셔서 주방도구들의 영어 이름도 배우고 팬케이크도 직접 구워 나눠주셨다. 물론 팬케이크는 그냥 받아먹을 수는 없고 "나는 팬케이크에 메이플 시럽/꿀/크림을 발라 먹고 싶어요"라고 스피킹을 해야 한다.     

비키할머니는 각종 주방도구를 모두 챙겨오셔서 팬케이크를 굽고 계신다

 영어를 배우고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만이 이 수업시간의 목적은 아니라 생각한다. 봉사자 할머니들에게는 대화를 나누고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상대가 필요할 테고 낯선 외지에서 언어장벽에 힘든 하루를 보내는 엄마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하기에 이 공간에 같이 있는 모두에게 의미 있는 시간인 것 같다.


 한 번은 연말에 서로를 칭찬해 주는 시간을 가졌었다. 한 중국 엄마가 “외지에서 아이들을 잘 돌보고 있는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어요”라고 말하자 제인 선생님은 아주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정말 힘들었겠구나”라고 대답해주었는데 이 엄마가 그 말 한마디에 갑자기 펑펑 울어버린 적도 있다. 언어로 충분히 전달하지 못해도 우리는 눈빛과 미소로 마음을 나눌수 있었다. 의사소통이 자유자재로 되지 않아도 우리가 살아온 삶의 길이만큼 서로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은 커지는 것 같다. 오늘 문득 혼자인 것 같고 위로가 필요하다면 마흔도 넘은 나를 “스위티~ 큐트 걸~”이라고 불러주는 따뜻한 할머니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어떨까.   

봄이면 자카란다와 꽃들이 가득한 영어수업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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