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의 뜨거운 여름을 시작하는 연말 휴가를 어찌 보내야 할까. 위드 코로나 시작과 함께 거의 2주 만에 폭증해버린 코비드 확진자로 인하여 우리의 2021년도 마지막 휴가는 또다시 취소되었다. 여러 차례 계획했다가 취소하고를 반복하다 보니 기대도 없었다 말하고 싶지만 이번에는 짐 싸들고 아이들과 공항까지 갔다가 돌아오다 보니 허탈한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연말 휴가다 보니 집에만 있기도 답답하고, 그렇다고 어디 가자니 일일 확진자가 2~3만으로 치솟는데 제정신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 우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이왕 짐도 다 꾸려져 있으니 자동차에 싣고 스노우 마운틴이 있는 스레드보(Thredbo)로 향하였다.
스레드보는 시드니에서 남서쪽으로 약 500킬로미터 정도 자동차로 달려야 한다. 우리는 휴가를 떠날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단숨에 스레드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멜버른과 브리즈번도 자동차로 다녀왔는데 이 정도쯤이야. 중간에 캔버라에서 잠시 쉴 겸 내셔널 뮤지엄에 들어갔다. 캔버라는 몇 번을 와도 정말 깔끔한 인상의 도시인데 내셔널 뮤지엄 역시 정말 크고 현대적인 건물에 딱 캔버라라는 도시와 같은 이미지의 장소였다. 게다가 코비드때문인지 관람객도 거의 없었는데 안내직원이 우리를 보자 다가와 반겨주며 물어보지도 않은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 특별관람은 티겟을 구매해야 하는데 다른 관람실은 다 무료니까 마음껏 즐기고 특별관람도 보고 싶으면 티켓을 사러 오라는데 특별관람을 추천하지 않는 의도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도 뭐 굳이 호주에서 그리스 특별전을 볼 필요가 있을까 그냥 잠시 걷다가 다시 자동차 여행을 할 의도였기에 천천히 무료 관람실을 둘러보았다.
내셔널 뮤지엄은 너무 깔끔하고 조용한 분위기에 경치를 보며 쉴 수 있는 공간까지 있어서 기대 이상이었다. 특히 몰롱글로 강과 저 멀리 팔리아먼트 하우스가 보이는 풍경은 정말 힐링이다. 사실 전시품은 잘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뮤지엄에서 보는 풍경이 좋았다.
캔버라 내셔널 뮤지엄
스레드보는 거의 오후 3시가 넘어서 도착했는데 마을이 너무나 호주 같지 않은 이국적인 분위기라서 놀랐다. 건물들도 그렇고 약간 짝퉁 스위스 마을 분위기랄까. 스레드보는 호주의 겨울철 스키 타는 장소로 인기 있다. 눈이 내리는 것을 거의 볼 수 없는 호주에서 펑펑 오는 눈을 볼 수 있는 마을이라고 한다. 그만큼 고도도 높은지 스레드로 들어가는 길은 구불구불 산등성이를 한참 타고 올라가 경치가 아주 훌륭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푸르른 스키 슬로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여름에 스노우 마운틴에 와서 뭐 할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지금은 이 슬로프에는 MTB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오는 차량들이 다들 자전거를 싣고 있었구나 싶다. 높은 곳에서부터 내려오는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이는데 10살 정도 돼 보이는 아이들도 꽤 많이 타고 있었다.
대부분의 액티비티는 4시 무렵에 이미 문을 닫아버려서 왜 캔버라에서 느긋하게 놀며 왔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어슬렁어슬렁 마을 구경을 하고 짧은 트레킹 길을 따라 걷다가 정말 할 일이 없는 것 같아서 숙소로 돌아왔다. 동네에 식당도 거의 없는 것 같아서 숙소에 있는 레스토랑을 예약해 뒀는데 작은 마을이라 기대도 안 했는데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감탄했다. 시골로 갈수록 음식양이 많아진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주문했더니 음식도 너무 많고 테라스 분위기가 너무 좋아 한참 머무르며 음료도 계속 시켜먹다 보니 금액도 깜짝 놀랄 만큼 많이 나오긴 했다.
다음날은 리프트 일일이용권을 구매하여 리프트 타고 올라가 트레킹도 하고 케이블카도 타고 루지도 타면서 스레드보에서 시간을 보냈다. 여름휴가를 보내려고 했던 케언즈의 그레이프 베리어 리프를 가지 못했지만 새로운 분위기의 호주 마을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시드니는 여전히 하루 2만 명 이상의 확진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이제 일할 사람이 없어 공급 부족 사태를 맞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마트에서는 다시 고기와 채소 코너가 텅텅 비어 있을 때가 많아졌다. 정부에서는 이제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렸어도 무증상이거나 아프지 않으면 나와서 일하라고 방침을 바꾸었다.
주변 지인들 중에도 걸렸다는 사람들이 속속 발생하고 있는데 2~3일 동안은 너무너무 아팠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목이 간질간질하기만 했다는 사람도 있다. 다들 백신은 맞았는데 면역력의 차이일까. 아파도 병원도 못 갈뿐더러 병원에 가도 특별한 처방이 없다 보니 아플 때는 호주의 국민 진통제 파나돌과 뉴로펜을 허용 최대치까지 먹으며 견딘다고 한다. 그래서 며칠은 또 마트의 진통제 선반이 텅텅 비어있기도 했다. 제한 조치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아이들을 데리고 공공장소에 나가는 일이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있다. 길고 지루한 여름방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