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8일, 오늘은 시드니 여름의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 작은 아이가 선생님이 오늘 여름의 마지막 날이라고 했다면서 우리의 입춘 같은 거라고 종알종알 이야기해 준다. 오늘 만나는 사람들마다 인사말처럼 ‘여름의 마지막 날인데 이렇게 비가 많이 오네.’라고 얘기해서 머릿속에 쏙 박혀버렸다.
벌써 열흘 넘게 흐린 날이 계속되고 있는 시드니, 한번 비가 쏟아지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붓는데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이런 비가 내린다. 그래서 아이의 등하교 시간 즈음에 폭우가 쏟아지면 때맞춰 멈출까 초조하기까지 하다. 현재 곳곳에서 홍수가 나고 있는데 지금의 폭우도 기상이변 현상이라고 한다. 아무튼 뜨거운 태양으로 각인되어 있는 시드니의 여름 이미지도 조금 달라지게 될까. 추운 겨울을 피해 뜨거운 시드니로 여행을 준비하는 관광객들은 이제 폭우를 잘 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또 다시 홍수 시즌
여름의 시작에 우리는 헌터밸리에 갔었다. 12월 초, 이미 석 달이나 지났는데 그때의 눈부신 푸르름이 생각나서 기록해본다. 여름 시작 즈음의 헌터밸리 포도밭에는 푸르게 자란 포도나무에 덜 익은 푸른 포도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우리는 한창 시드니가 락다운일 때, 평소에는 빈방이 없거나 너무 비싸서 엄두가 나지 않던 숙소들이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길래 그냥 예약해 뒀었다. 가면 좋고 못 가면 취소하면 그만이지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우리에게 여행 취소와 환불은 그냥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그리고 여행일 즈음에는 여전히 주간 이동은 제한되어 있지만 NSW주 안에서의 이동은 자유롭게 되어서 헌터밸리 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초여름의 헌터밸리 포도밭
헌터밸리는 시드니에서 자동차로 2시간 정도 달리면 갈 수 있는 아주 가까운 와이너리로 유명한 관광지이다. 이동제한이 있다 보니 너도나도 헌터밸리로 쉬러 가는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락다운으로 답답해서 떠나고 싶은 마음은 어디나 똑같은 것 같다. 사실 우리는 이전에 헌터 밸리에 갔을 때 너무 실망했었다. 코비드로 인원 제한 조치가 있을 때여서 어딜 가나 인원이 차있었고 예약 없이 온 우리 가족은 끼니를 챙기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준비를 철저히 안 하고 간 우리의 잘못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2박 3일 여행이지만 완벽하게 예약을 했다. 아침식사는 호텔 조식으로, 저녁 레스토랑, 와인 시음, 골프장까지. 시간 맞춰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기 괜찮을까 싶긴 했지만 다른 특별한 액티비티가 없는 시골 분위기의 헌터밸리이기에 오히려 예약해둔 대로 움직이는 것이 무척 편했다.
가는 길에는 파충류 동물원이 있어서 들렸다. 얼마 전에 NSW주 정부에서 경기부양 지원으로 성인 1인당 레스토랑에서 쓸 수 있는 바우처와 문화생활에 사용할 수 바우처를 각각 75달러씩 지급했는데 이 바우처를 이용해서 오랜만에 동물원에 입장하였다. 아이들이 이제 커서 동물원에 관심이 많이 줄었기에 살짝 입장료가 비싼 느낌이 있었지만 지원받은 바우처를 쓰니 또 왠지 기분이 좋다. 이 파충류 동물원은 의외로 굉장히 넓었는데 하이라이트는 저수지에 있는 악어 먹이주기 시간이었다. 살짝 공포스러운 악어 먹이주기 쇼를 보고 다시 헌터밸리로 향했다.
Australian Reptile Park : 악어 식사시간(식사 재료가 뭔지 살짝 공포스러운 식사시간)/ 파충류는 아니지만 상당한 토지를 점유한 캥거루
헌터밸리에 도착해서 처음은 와이너리에서 와인 시음을 했다. 번화한 지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와이너리인데 약간 스페인에 온 분위기랄까. 스페인 분위기의 테라스에 앉아 싱그러운 포도밭을 보며 와인을 마시는 기분이 참 좋았다. 물론 아이들이 번잡하게 굴어 분위기를 깨곤 하지만 말이다. 호주 와인은 약간 강한 느낌이 있어 그리 즐기진 않는데 이곳 와인은 무척 부드럽고 음, 사실 와인 맛을 잘 모르지만 맛있었다. 이곳 와인은 시중에서 팔지 않고 소비자들과 직거래만 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보틀샵보다 비싼 가격도 아닌 데다가 6병 이상 사면 할인도 많이 해줘서 계획에 없었던 와인까지 구매하게 되었다. 호주 내에서도 맛있는 와인은 이렇게들 사나 보구나 싶었다.
Iron Gate Estate
골프장 내에 있는 첫날 숙소는 2층짜리 독채로 아주 조용하고 깔끔했는데 다만 너무나 자연친화적이다 보니 천장의 모서리마다 거미들이 집을 짓고 있었다. 여기 원래는 비싸서 묵기 힘든 호텔이라고 해도 아이들은 거미 때문에 편히 쉴 수가 없다며 난리였다. 물론 한번 잠이 들고는 세상모르게 아침까지 잘 자더구먼. 다음날은 오전부터 아이들과 골프를 치며 보냈다. 골프장 경치가 어찌나 좋은지 푸른 포도밭을 내려다보며 골프를 치니 너무 좋은데 다만 아이들이 지루해할까 봐 둘씩 편먹고 내기를 했더니 너무 과열되어 둘이 싸우고 울고 난리도 아니었다.
Cypress Lakes Resort 골프코스
골프로 반나절 보내고 헌터밸리에서 유명한 디저트 가게에서 대충 점심 대용 간식을 먹고 다음 숙소의 수영장에서 놀며 포도밭을 보다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여행을 마감하니 정말 휴식이 되는 기분이다. 특히 지난번에 헌터밸리에서 식당 자리도 못 구해 동동거리며 여행했던 기억과 대비되어 더욱 만족스러운 휴식이 되었던 것 같다. 역시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계획이 철저할수록 좋다. 우리는 이렇게 짧은 휴가로 초여름의 푸른 기운을 가득 받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