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세상이 온통 예쁘다. 따스하다. 온기가 가득하고 꽃들이 찬란하며 화사하다. 한낱 작은 미물인지라 그 안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따스한 기운이 생동생동 전해지나보다. 여전히 쉽지 않은 하루들이었지만 우리는 그 날들을 제법 따스하게 채워나갔기 때문이다.
올해 첫 학폭사안이 접수되었고, 새로 도입된 전담조사관의 조사 실시, 관련 학생들과 학부모들, 담임교사들과 학교관계자들 챙기기, 신속하게 교육청 보고하기, 학교전담경찰관과 협조기관 연계 대응 등 업무가 쏟아졌다. 성 관련 사안이었고, 다들 촉각이 곤두서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버겁지 않았다. 아이들은 선뜻 잘못을 인정했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었으며, 어머니들은 처벌보다는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주셨고, 학교는 적극적으로 교육적 조치를 위한 업무협조를 이루어냈다. 간단히 말해, 학교장 자체해결로 잘 처리되었다는 뜻이다. 학폭업무 3년째다. 처음이다. 이렇게 훈훈하게 사안이 매듭지어진 건.
가해관련 어머님께 마지막으로 전화드리던 날이었다. “어머니, 이젠 제 전화 받으실 일 없으실 거예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화기 반대편에서 잠시 소리가 없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 울컥하셨던거겠지. 적당한 인사말로 전화를 끊어드렸다. 전화기 저편, 어머님께서 부디 울컥한 자신의 마음을 토닥토닥해주고 계시기를.
업무처리를 하면서 매번 그렇듯 나의 의도치 않은 말이나 행동, 처리방식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까 봐, 혹은 실수로 인해 불필요한 불씨가 생겨나 더 일이 커지고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까 봐 초집중 긴장모드로 지냈다. 그 와중에도 수업과 살림도 돌보며 천수천안 마냥 살았다. 하필이면 업무가 쏟아지던 시기의 수업 활동은 교사의 에너지를 많이 쏟아야 하는 내용이었다. 크고 작은 악기들을 지고 나르며 음악합주를 했고, 영상촬영도 했으며, 결과물을 공유하고, 감상까지 해야 했다. 아이는 감기에 걸려 병원을 데리고 다녔고, 내가 있는 교무실 복사기는 참 실속있게도 계속 고장, 수리 중이었다. 헛웃음. 하. 정말 나를 불살랐던 것 같다.
가해관련 어머님과의 마지막 통화를 한 후, 털썩, 의자 깊숙이 몸을 내려놓고 나니 그제서야 나도 울컥, 한다. ‘살았네, 살았어. 잘 살아남았네, 토닥토닥.’ 살았다는 말을 속으로 되뇌는데 자꾸만 ‘살랐다’로 들렸다. ‘살랐네, 살랐어, 잘 불살랐네, 토닥토닥.’ 허옇게 불살라진 나, 그리고 우리.
금요일 퇴근 시간. 교감선생님께서 메시지가 오셨다. 선생님, 고생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쉬셔요. 교무실에서 마주치거나 지나가는 선생님들 모두 내게 눈을 마주치고 인사해주셨다. 푹 쉬어요, 쌤, 고생했어요, 다 털어요, 불금, 파이팅! 선생님, 감사합니다, 맛난 거 잔뜩 먹고 푹 자고 쉬어요 등등.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오늘 떡볶이! 미소지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잘 살랐더니 잘 살아졌나보다. 그래, 오늘 밤은 떡볶이다. 함께 살아주시고 살라주신, 그렇게 우리의 세상을 함께 따스한 말들로 따스하게 만들어준 분들과 봄빛, 그 기운에 나는 오늘 떡볶이를 공양해 본다. 이 떡볶이들 드시고 부디 다들 얼마간은 살라지지 않아도 살아지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