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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적인 하루 May 09. 2020

009. 손님은 왕

상경

동묘를 가면 꼭 함께 들리는 패브릭 가게가 있다. 천 가게라고 해도 되지만 패브릭 가게라고 부르고 싶다. 그곳에서 판매되는 패브릭에 영어가 많이 있기도 하고,(사장님 말씀으론 ) 해외 수입 제품이 많기도 해서 천 가게보다는 패브릭 숍이나 패브릭 가게가 어울리는 곳이다. 청계천을 따라 이어진 길목에 위치한 이곳은 갈 때마다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가서 정확히 어딘지 구체적으로 콕찝지도 못한다. 매번 용케 찾아내는 게 신기할 정도다. 이 가게의 이름을 적으려 하다 가게의 간판도 한번 제대로 본 적이 없단 사실을 깨달았다.


가게에 들어가면 눈이 휘둥그레 진다. '와 진짜 너무 귀여워, 너무 에뻐'를 난발하게된다. 켜켜이 쌓여있는 천들을 뒤지며 과연 어떤 놈을 데려갈지 행복하고도 진중한 고민에 빠진다. 아주 오래된 달력이 프린트된 패브릭이라던가, 오염이 좀 있지만 독특한 빈티지 패브릭 까지. 내 취향을 탕탕 저격한 이곳에 처음으로 발을 들였던 날 다시 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바로 이곳의 사장님 때문이다.


이 매력적인 가게의 사장님은 그렇게 상냥하진 않다. 잘 웃지도 않고 먼저 말을 걸지도 않는다. 처음 그 가게에 들린 날엔 '여기 다신 안 온다' 하고 가겔 떠났었다. 차갑게까지 느껴지는 그의 무심함 때문이었다. '다시는' , '절대' 같은 말을 쓸 때 한번, 또 두 번 생각해보라는 엄마의 말을 망각하고 한 말이었다. 그 말을 한 뒤로 두 번을 갔다. 자존심보단 나의 물욕이 더 앞섰다. 아무튼 두 번째는 조금 달랐다. 사장님의 무뚝뚝함에 그리 불쾌하지 않았단 말이었다. 되려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 그때 내가 왜 불쾌해했는가, 반문하게 됐다. 아무리 기억해봐도 사장님이 짜증을 내거나 신경질적인 태도는 아니었기에. 그저 웃음이 없을 뿐, 묻는 말에도 잘 대답해주셨고 가격도 정직한 편 같았다. ( 사실 가격은 비교대상이 없어 추측하는 것이다 ) 다만 그는 웃지 않고, 나서서 이것저것 추천해주지 않을 뿐이었다. 나는 무엇을 바랐지. 사근사근하게 옆에 붙어 서서 이것저것 권하는 걸 바랬던 것일까. 정작 옆에서 이것저것 권하는 사장님들을 불편해하면서도 말이다.


2년 전 리스본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과 저녁을 함께했었다. 우리는 술을 한두잔씩 마시며 여행중 에피소드를 하나씩 늘어놓았다. 그때 나는 불친절한 미국 항공사 에피소드를 꺼내 들었다. 모두가 공감할만한 일이라 생각해서였다. 역시 서비스는 한국이에요, 대한 항공만 한 게 없다니까요? 라며 한국의 서비스를 치켜세웠다. 그 말에 누군가가 '나는 그게 너무 싫어요. 그게, 너무해. 너무 친절하고, 또 그걸 강요하고' 라 말했다. 그 말을 한 사람도, 그 주변사람도 서비스업에 종사했었던, 하고있던 사람이었다. 그들의  조용하면서도 무거운 끄덕임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곤 '손님은 왕 모르나?' 하고 속으로만 불평했다. 그리고 무려 2년 전 그때 그녀의 말이 오늘에야 다시 환기되는 것이었다. 포르투갈 말고, 공항 말고, 청계천 어느 작은 상점에서.


친절을 강요하는 문화를 생각해보며, 내가 돈을 쓸 때 거기에 일정 이상의 친절함, 혹은 저 밑바닥에 숨겨뒀던 갑질의 욕망이 꿈틀거리진 않았는가 생각해봤다. 나는 그의 친절함보다 '굽신거림'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괜한 죄책감에 목을 한번 가다듬고 사장님께 먼저 말을 걸었다. '여기 정말.. 너무 찾고 싶었어요 하하..' 멋쩍게 말을 걸고 재빠르게 웃음을 더했다. 그러니 사장님이 어색히 짧은 미소를 지었다. ' 아.. 네.. 여기 명함이에요 ' 함께 멋쪅어 하며 명함을 내미는 그의 얼굴을 봤다. 전엔 그려보지 못했던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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