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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적인 하루 May 13. 2020

010. 꿈에서 만난 사람

부신 눈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뻑뻑한 눈 때문에 다시 한번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am 3:00

방지 할머니가 꿈에 나왔다. 할머니가 그리웠었나. 별 내용 없이 할머니만 등장한 꿈이었는데 눈물이 흘렀다. 

눈물의 감촉에 눈을 뜬 게 맞았다. 중간에 깨버린 꿈은 기억에서 쉽게 사라진다. 잠결이었지만 잊고 싶지 않아 카톡 내게 보내기 창을 열었다. 다시 제 시간에 일어났을땐 다행히 메모를 확인하지 않아도 꿈의 끝자락, 할머니가 나왔던 장면이 떠올랐다.아주 오랜만에 본 얼굴이라 그런가 꿈이 생생했다. 할머니 냄새가 나는 거 같았다.


방지는 경상북도 청도의 아빠의 고향인 곳이다. 부산에 사시는 외조부모님과 구분하여 부르기위해서 지명이 자연스레 호칭으로 붙었다. 방지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할머니 할아버지라 부르는건 두 분 뿐이지만. 

돌아가신지 오래 되어 이제 정말 너무 먼 사람이 된 방지 할머니. 오늘 새벽 14년 전 그날처럼 꿈에 나왔다.14년전 그 날이라 하면, 초등학교 5학년. 초등 필리핀 영어캠프에 참가했을때였다. 첫 해외경험이라 매일매일이 흥분한 상태였던 나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며 아주 잘 먹고 아주 잘 자며 지냈다. 그리고 귀국을 하루 앞 둔 아쉬운 밤. 방지 할머니가 꿈에 나타났다. 3학년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방지에 계시다 우리집에, 큰댁에 왔다 갔다 하셨던 때였던것같다. 자세한건 기억나지 않지만 유독 외로워하셨고 '답답하다'라는 말을 달고 사셨던 기억은 난다. 꿈에서 이도 별로 없는, 꼬부랑 할머니가 뭐라고 뭐라고 입을 오므렸다가 열었다가 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평소에도 발음이 새고, 옛말을 쓰는 할머니의 말을 이가 다 자란 나는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괜히 찝찝했지만 꿈을 덮어두고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 큰고모와 가족들이 함께 마중 나왔을 때도 나는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다. 운전대를 잡은 아빠 뒤에서 캠프가 얼마나 재미있었고, 내가 얼마나 잘했는지를 무거운 침묵속에서 재잘거렸다. 운을 떼려는 아빠를 막으며 캠프에서의 일화를 쏟아내려 할 때였다. 단 한 번도 내게 무거운 표정을 지은 적 없는 장난기 많은 고모가 단호하게 "서정아 아빠 말 들어라"라고 내 말 허리를 잘랐다. " 할머니, 돌아가셨다" 엄마의 죽음을 조카에게 알리는 고모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 말을 자를 때의 그 서늘하고 낯선 분위기만이 또렷하게 남았다.


방지 할머니는 방지 할아버지 다음으로 내가 두 번째로 떠나보낸 사람이었다. 내가 두번째로 맞이한 죽음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처음으로 아빠가 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할아버지가 끌어주던 리어카, 사촌들과 갔던 할아버지의 작은 포도밭.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아주던 감자. 같은 것들이 떠올라서 동생과 단둘이 남겨진 차 안에서 조용히 울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소식을 듣고 분명 눈물이 났지만, 할아버지가 떠나갔을 때처럼 행복했던 추억 같은 것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거운 기억들이 내게 진득히 자리잡고있었다. 할아버지를 먼저 보내시고 외롭고 혼자 있기 무섭다던 할머니는 우리 집에오셨다. 우리집에선 항상 답답함을 호소했다. 엄마와 아빠는 삶이 너무 정신없었고, 나와 동생은 그런 할머니를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다. 각자의 일로 바빴던 가족들 사이에서 그녀는 그저 가만히 앉아있었다.


꿈에서 할머니는 나를 강아지야 라고 불렀다. 적어도 오늘 내 꿈에 나온 할머니는 방지 할머니가 아니다, '강아지' 그 말이 어디서 나온 거지. 아무리 내 무의식이라지만... 할머니는 나를 강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강새이,강새이  '라고 불렀지. 할머니가 강새이라고 나와 동생을 부를 때면 얼굴은 하회탈 같았다. 주름이 자글자글 깊게 파이고 이가 보이지 않는 하회탈. 꿈속의 할머니는 왜 나를 강아지라 불렀을까. 일종의 테스트였을까? 당신을 까마득하게 잊고사는 손녀가 과연 이건 기억하는지. 할머니의 첫번째 테스트는 통과했지만 나를 부르던 그  목소리가 아득하다. 대신 생생히 기억에 남은것은 할머니의 냄새다. 시골집에선 쿰쿰한 냄새. 메주, 간장, 고추장, 곶감, 비료, 소똥 냄새가 뒤섞여 하나의 냄새를 만들어 냈는데 그 냄새는 할머니에게도 베여있었다. 그 냄새 뿐만아니라 다림질을 하고나면 나는 빳빳한 냄새도 났던것 같다. 할머니에 대해 기억하는 대부분이 뿌옇게 흐려져 있어서 자신있게 말할 수있는게 별로 없다.


뭐하나 자신있게 설명할 수도없는 그녀가 그립다. 그래서 오늘의 꿈에도 갑자기 등장하신거겠지. 10여 년 동안 가장 구석에 묻어뒀던 방지 할머니가 갑자기 왜 이렇게 그리운 것일까. 그때는 몰랐고 , 알고 싶지도 않았던 그녀의 마음을 지금은 조금씩 이해가 되기 때문일까.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프로그램에 한가위 특집으로 시골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나온적이 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외롭게 있다가 자식, 손자 손녀들이 오면 그렇게 행복하다는 할머니. 본인과 침 섞이는걸 어린 손자들이 싫어할까 밥도 덜어먹는다는 할머니를 보는데 방지 할머니가 자꾸 떠올랐다. 친구도 별로 없고, 남편과 자식들이 전부였던 그녀가 덩그러니 마루에 앉아 감나무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그 옆에 아무도 없다. 



할머니댁 뒷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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