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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적인 하루 May 06. 2020

008. 그럴 의도

상경

종종 일상적인 단어를 네이버 사전에 찾아본다. 좋아하는 작가가 사전을 옆에 끼고 산다는 말을 듣고 생긴 습관이다. 두꺼운 종이 사전까진 힘들고, 네이버에 검색해서 동음이의어나 반대어를 찾아보는 것이다. 혀를 내밀고 ‘메롱’ 네이버에 검색해봤다. 별 이유는 없다. 메롱. 메롱이라는 단어도 오랜만, 행동도 오랜만이다. ‘어린아이의 말로, 상대편을 놀릴 때 내는 소리’라는 심심한 설명이 나왔다. 사전 의미 아래로 지식in에 누군가 ‘메롱이 학교 폭력인가요?’라는 글을 올린 것이 나왔다. 이건 실로 예상치 못한 전개다. 귀여운 혀 내밀기 장난이랑 학교 폭력은 영 매치가 안되지않나? 궁금한 마음으로 게시글을 클릭했다. ‘학교 폭력의 기준은 어떤 단어를 쓰는가 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당사자의 마음이 기분 나빴다면 학교폭력이 될 수도 있겠죠’라는 누군가의 댓글이 달려있었다. 바로 밑엔 교육부에서 달린 글도 있었는데, 역시나 ‘상대방이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냐가 중요해지고 있다’였다. ‘당사자의 마음, 상대방의 마음’을 곱씹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비단 학교 폭력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폭력’ 이란 말은 나와는 왠지 거리가 먼 말 같고, ‘가해자’는 뉴스에서 검은 실루엣으로 등장하는 극악무도한 범죄자 일 것만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친구와 연남동에서 커피를 마셨던 그 날. 조금 쌀쌀했지만 볕이 좋아 야외에 자릴 잡고 앉았던 그 날. 친구가 폭력적으로 느꼈던 그 말은 ‘너 진짜 말 희한하게 한다’였다. 친구에게 상처 줄 의도 없이 말했던 것이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서 그 친구 집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맥주 두 캔이 비워질 때 쯔음 친구가 말했다. 그 날에 대한 이야기였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어 내 말투가 그렇게 이상한가 하고’ 사과를 종용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나는 조금 당황스런 마음으로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네가 그렇게 생각할 거라곤 미처 몰랐네 미안해’라 말했다.


그녀가 집에 돌아오는 길 내 말을 한참 들여다봤었듯, 나도 그날 집에 돌아오는 길 그때의 내 말을 그리고 친구의 말을 한참 들여다봤다. 천사와 악마가 등장하여 내 귀를 한쪽씩 맡아 속삭였다. ‘걔가 너무 예민해, 무슨 말을 못 하겠어’ 한쪽에선 ‘걔가 상처라면 상천 거야 말조심하자’ 하고. 악마의 목소리가 커져갈 때쯤 내가 잠시 멈춘 것은 ‘무슨 말을 못 하겠어’였다. 언젠가 내가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그런 말을 듣고 상처 받았던 묘연한 날들이 생각났다. 그 말이 내 머릿속에서 나오게 될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제서야 친구에게 성급한 사과를 한 것이 진심으로 미안해졌다. 


아주 솔직하게 고백하겠다. 그날 내게 한 톨의 ‘그럴 의도’가 없었냐고 묻는 다면, 솔직히 ‘아니. 나는 한점 부끄러움 없다’라곤 못하겠다. 그때 나는 분명 그 애의 말을 조롱했다. 그 날의 웃음 소재로 쓰려했다. 그러니 ‘그럴 의도’, ‘본의’ 같은 것들이 없이 순수하게 그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친구에게 ‘그럴 의도였는데 네가 상처 받은 건 내 계획이 아니었다. 쏘리’하고 말하기엔 내가 너무 악랄해지니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보탠 것이었다.


메롱.

어쩌면 어느 날 누군가 교실에서 했을 메롱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메롱을 한 이도 당한 이도 알았을것이다 그 메롱이 다섯살 아이의 순진무구한 메롱이 아니라는것을. 많은 폭력들이 ‘그건 네 오해야. 왜 그렇게 예민하니’로 뭉뚱그려지지 않았는지. ‘네가 곡해했다’로 상처 받았을 그에게 누명 씌우진 않았는지도 생각해본다. 


즐겨봤던 드라마(이자 소설 )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속 여자 주인공 대사로 이 글을 마무리 짓겠다.

‘누가 뭘 오해했다는 건데. 그건 두 번 상처 주는 거야. 오해할 만큼 이해력이 모자랐거나 독해력이 떨어졌거나. 의사소통에 센스가 없어서 혼자 잘못 알고 있었다는 거잖아. 그거 아니잖아. 오해는 없어. 누군가의 잘못이 있었던 거지. 그걸 상대방한테 네가 잘못 아는 거야.라고 새롭게 누명 씌우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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