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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적인 하루 Apr 30. 2020

007.어렵지 않은 부탁

상경

4월 4일. 4 4 괜히 불길한 날. 엄마의 전화 한 통이 왔다.
 ' 쩡 ( 나의 애칭이다 ) 할아버지한테 전화 좀 해줘. '
 '무슨 전화? 얼마 전에 통화했어 할아버지가 나 생일 축하한다고 '


'아니 그게 아니라 ... .... '


뒤에 이어진 엄마의 말은 이러했다. 외가에 사과를 드리러 갔다가 잠시 앉아 할 아버지와 차를 마셨는데, 가족끼린 논하는 게 아니라는 '정치'가 화두에 오른 것 이었다.( 정치색을 논하는 장이 아니니 일화에만 집중해주길 바란다. ) 운동권 출신이었던 엄마는 파란 불모지 대구에서 뼛속까지 뜨거운 파란피가 흐르는 사 람이다. 민주당 의원이 당선되었던 이례적인 날, 엄마는 개표방송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언젠가 내가 100점짜리 시험지를 가져왔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지금의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땐 환호성을 지르며 치킨을 시켜주기도 했다. '쩡! BBQ 시켜!'


반면 외할아버지는 빨간 정열의 심장과 빨간 피를 ( 아마 지금은 핫핑크가 되었을 것이다 ) 지닌 이다. 지난 대선 때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던 할아버지가 스 쳐 떠오른다. 할아버지가 광화문 시위에 나서기엔 너무 먼 대구에 사는 것에 나 는 안도했다. 할아버지가 참가할 수 없어서 다행이었던 그 시위는, 엄마가 잔뜩 인상을 쓴 채로, 귀를 막고 지나친 시위였다. 그러니 두 사람 사이에서 정치 이야 기는 금기의 주제였다.


가족끼리의 정치논쟁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정치논쟁은 누구 하나가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가끔 정치 이야기로 스파크가 튀는 엄마와 할아버지나, 아빠와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큰아빠가 이해되지 않았다. 언제나 불합치라는 빅데이터가 충분히 쌓인 뻔 한 싸움이었다. 결말을 아는데도 왜 전장에 뛰어드는 것일까. ( 어짜피 대구는 보수라는 말에 도전하는 정치인들 같은 마음일까.) 그들의 상대는 오랜 세월 견 고히 다져온 가치관으로 중무장하고 있고, 그 콘크리트 같은 생각을 한 시간 남짓의 대화로 깨기는 어려운 일이다. 엄마가 그걸 몰랐을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시기가 문제였다. 사건이 발생한 그날은 투표를 앞두고 신문이며 뉴스 에서며 정치인들의 말, 혹은 사건 등이 쉴 새 없이 나올 때였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눈높이에서 전혀 다른 표정으로 아침 뉴스를 보고 다른 온도의 생각을 가지고 만났을 것이다. 아마 할아버지는 유튜브에서 봤을 찌라시 뉴스를 자연스레 건네었을 것이고, 처음엔 담담하게 받아치다가 화를 이기지 못한 엄마가 목소릴 높였을 것이다. 두 부녀의 언쟁이 잦은 편은 아니었지만, 아니 오히려 가족 중 가장 서로를 아끼는 두 사람이지만 언젠가 두 사람의 언쟁을 목도한 적이 있었기에 흥분해서 말이 빨라지는 엄마라던가, 언짢은 얼굴로 입을 단단히 다무는 할아버지 모습이 생생했다. 엄마와 정 반대의 정치성향을 띄는 동네 친구들 앞에선 덤덤히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엄마의 아빠 앞에선 왜 그렇게 쉽게 놓아 버리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엄마가 할아버지 앞에서 큰 목소리로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날 목청 좋은 엄마를 웅변학원에 보내줬던 할아버지 덕도 있다. 할아버지 댁에 갈 때면 부산시 대표로 웅변대회에 나갔던 엄마를 자랑스레 내게 말해주곤 했다. '그 상패가 어디 있는데, 함 보여줄까?' 하며. 엄마의 정치색도 어쩌면 할아버지가 칠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여자가 공부해서 뭐하나가 만연 했던 때였다. 할아버지는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한다'며 엄마를 재수학원에 보냈 고, 대학에도 보냈다. 엄마도 한참 뒤에 안 것이지만 엄마를 재수학원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길, 할아버지는 혼자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당신을 가장 잘 따르는 맏딸의 첫 번째 실패에 대한 아쉬움, 안쓰러움이 뒤섞인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대학생이 된 엄마에게 할아버지는 아르바이트할 시간에 공부를 하라며 아르바이트 금지를 명했는데, 고분고분 말 잘 들었던 그녀는 정말로 아르바이트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학생운동에 나섰다. 할아버지가 학생운동을 하지 말라곤 안 했나 보다. 설마 나의 맏딸이? 하셨겠지. 나는 이 아이러니하고 복 잡하게 이어진 이야기를 입에 한가득 물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대신 엄마의 부탁을 거절하기로 했다. 내 거절에 대한 엄마의 답은 '흥, 쳇'이었다. 엄마는 무심 한 딸에 서운해했지만 화해의 손은 엄마의 손이 되는 게 맞았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엄마에게 ' 할아버지와 화해는 잘했어?'라 물으니 내 고민이 무색하게도 '우리 싸운 적 없는데?'라는 어처구니없는 답이 왔다. '아니, 그럼..!' 하고 다음 답을 보내려는데 곧장 다음의 카톡이 왔다. 그 카톡을 그대로 옮겨본다.


‘그냥. 내가 너무 강하게 말해서... 후회했지.. 80 노인 생각을 내 임의대로 바꾸려고 했던 게... 세대별 생각의 존중, 배려가 약함을 반성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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