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정적인 하루 Mar 07. 2022

친절한 내가 싫어서

첫 번째 회사, 처음 진짜 사회생활에 들떴던 나는 회사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애썼다. 소위 말해서 싹싹하게 굴었는데 대화가 어색하게 끊기지 않게 신경 썼으며 불편한 상황 불편한 요구에도 방긋방긋 잘 웃었다. 속으론 치를 떠는 사람 앞에서도 친절한 톤 앤 매너를 유지했다. 설사 상대가 실수하더라도 웃고 넘겼다. 어쩌면 그런 것들은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쌓아 왔던 친절 모드였고 나는 그걸 사회생활이라 불렀다. 사회생활이란 그런 것이라, 누구와도 적을 만들지 않겠다는 이념 하에 사실 아니 그보다는 모두에게서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내 성정이 그저 사근사근한 편은 아니니 이는 때때로 아주 많은 에너지를 요했다.


친절 모드가 불편해진 것은 회사에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조직개편으로 나간 사람 들어온 사람이 많았던 때. 이 사람 비위에 맞춰놓으면 나가고 또 다른 이가 들어오니 나의 친절 모드에도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가증스러웠던 껍데기를 한 겹 풀어두고 둘러보니 이상한 것이 있었다. 왜 나를 비롯한 여자 동료들만 둥글둥글 푹신푹신한 말과 표정일까.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 등등 상술로 그득한 기념일을 앞장서 챙기는 것은 여직원들이었다. 둥글둥글한 손글씨로 사근사근한 말투를 담은 짧은 쪽지와 함께 빼빼로, 초콜릿 같은 달큼한 간식을 자리마다 돌리는 것은 여직원이었다. 업무 카카오톡방에서도 아닙니다~ 맞습니다~ 하는 당당당 체는 여직원들의 전유물이었으며 가끔 밥도둑 반찬처럼 귀여운 동물 이모티콘도 곁들여졌다. 술자리에서 남자 대표 옆에 앉아 흥을 띄우는 것도, 2차에서 앞장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여직원이었다. 그제야 모든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남직원들은 그리 둥글게 하지 않아도 핀잔 듣는 이 하나 없었으며 나 또한 그게 익숙해져서인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 모든 것들이 정말 이상하다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판단을 내린 것은 내가 짧은 메시지 '네 감사합니다'를 적고선 웃는 이모티콘을 재빠르게 넣을 때였다. 부탁드립니다. 뒤엔 느낌표와 웃는 이모티콘, 죄송합니다 뒤에는 ( 내부 메시지일 경우 ) ㅠㅠ라도 붙여야 예의 있어 보였다. 이상한 예의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것들을 넣지 않고는 배겨서 어쩔 수없었다. 회사에서 프로페셔널하다고 평가받는 한 남직원의 말씨 말투 표정을 유심히 관찰해봤다. 그의 입에서 네! 이라던가~당 같은 이응 가득한 말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메시지에서도 '네 알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같은 딱딱히 각진 말투를 썼다. 그 네모 각진 메시지를 읽을 때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도 그는 악역이 아니었다. 그를 예의 없는 사람이라 평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오늘은 '안녕하세요 이사님, 금일자 작업물 전달드립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를 적곤 바로 전송을 누르지 못하고 가만 멈췄다.  안녕하세요 뒤에 :) 스마일을 붙여야 하지 않을지, 확이 부탁드립니다 뒤에 느낌표라도 넣어햐 하지 않을지 고민을 하다 간신히 아직 내 눈엔 밋밋해 보이는 메시지를 보냈다. 아마 나는 오늘도 내일도 이따위의 작은 고민을 하겠지. 그래도 왠지 덜어내는 고민이 덧붙이는 고민보다 편해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의 8할은 사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